2013년 4월 1일 월요일

[기획특집]테무진to the칸(23) 초원통일

딴지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징기스칸(테무진)의 일대기를 다룬 기사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아는 글입니다만, 요즘 딴지일보 사이트가 접속이 잘되지 않고 있습니다. 해킹이나 DDos 공격등으로 고생이 많은 모양입니다. 그리고 얼마전 해킹으로 자료도 많이 사라졌다고 "나꼼수"에서 김어준 총수가 밝힌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인 문제를 떠나서 징기스칸 테무진의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봐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제 블러그에도 옮겨서 게시하기로 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Daum에서 현재 허영만 화백의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 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징기스칸 테무진의 이야기 입니다. 보면 볼수록 놀랍고 인간적으로 그리고 성공한 사람으로서 배울점이 참 많은 인물인 것 같습니다. 그 파란 만장한 이야기 또한 너무 드라마틱합니다. 여러분들도 열독해 보시길 권합니다....^.^..

[기획특집]테무진to the칸(23) 초원통일

2012. 2. 27. 월요일
부편집장 필독






(전편에 이어) 이제 테무진은 패퇴한 나이만 군이 갇힌 나코 벼랑을 공략해야 했다. 일반적인 전쟁이라면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 충분히 이겼으니, 약탈할 걸 충분히 약탈한 후 개선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테무진은 초원을 통일하려는 분명한 의지를 갖고 있었고, 그건 패자 측인 자무카도 마찬가지였다.
자무카… 정치에서는 테무진에게 항상 밀렸지만, 전쟁터에서 보여준 실력으로는 언제나 테무진을 압도해 온 자무카.
10대에 몇 개 씨족을 휘하에 두고 자신의 영기를 소유하고, 약관 스무 살 때 연합군의 사령관을 맡아 강성한 메르키트 부족을 박살낸 용병의 천재. 무장을 검은 색으로 통일하고 말도 새까만 말을 탔던 스타일리쉬한 흑기사. 20대에 자기 부족(몽골족)의 순혈 귀족 70명을 거리낌 없이 처형한 젊고 싱싱한 악마. 별칭은 온 우주의 지배자라는 뜻의 ‘구르 칸’.
자무카는 전형적인 군사영웅이었다. 전장에서 보여준 천재적 두뇌와 괴물 같은 카리스마, 존재감, 단호함, 차가운 금속질의 냉혹함, ‘수컷의 질’이 떨어지는 사내는 인간취급을 해주지 않는 오만함, 숨기지도 숨길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던 야망까지. 르네 그루쎄의 표현을 따르자면 자무카는 그야말로 ‘가공할 적’이었다.
그 자무카가,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하고 다른 것도 아닌 군사적 능력에서 테무진에게 완패했다. 그는 경악했을 것이다. 자무카는 이제 자신이 테무진을 결코 넘어설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다.
당연히 절망적인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인간들이 가진 특징이 하나 있다. 판단이 빠르고 정확하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게도 섬뜩할 정도로 냉정하다. 테무진이 결론을 내릴 때 우왕좌왕하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묻는 것과 달리, 자무카는 담담하게 그러나 고민하지 않고 쓰라린 결론을 삼켰다. 그의 베스트프렌드인 테무진은 군사적으로도 자신을 뛰어넘었으며, 이제 테무진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오랜 싸움의 결론이 났다. 자무카와 테무진은 원래 베스트프렌드고, 상대를 말살하기 위해 싸우는 와중에서도 끈끈한 우정을 교감하는 묘한 사이였다.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어지면, 이제 남는 것은 우정뿐이다. 자무카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진짜 남자’였다. 이 개마초는 차키르마우트 전투 직후부터 테무진에 대한 우정을 빠르게 회복하기 시작한다. 그건 테무진도 마찬가지였다.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나이만의 군세는 아직 상당했다. 나이만 군은 뭉쳐 있다. 반면 테무진 군은 나코 벼랑 일대를 포위하느라 빙 둘러 점점히 흩어져 있다. 각개격파는 병법의 기본이다. 높은 위치라는 유리한 지점을 확보한 나이만 군이 어느 한 지점을 공략해 밀고 내려오면 반드시 뚫리게 되어 있다. 여기서 테무진 군은 수없이 네르제를 하며 익혔던 군사 훈련을 제대로 써먹는다.


전통적인 포위법은 적에게 ‘너네 포위당했어 이것들아.’ 하고 아군의 위치를 의기양양하게 노출시킨다. 그리고는 일제히 함성을 지르는 식으로 군세를 과시한다. 테무진은 정반대의 전술을 폈다. 현대 육군전술의 기본 중 하나인 ‘은폐 및 엄폐’를 통해 아군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것이다.
나이만 군사들은 차키르마우트 회전의 믿을 수 없는 패배로 테무진 군에 대한 공포에 짓눌려 있었다. 공포는 전염성이 있다. 이 상황에서 테무진 군의 병사들도 똑같은 인간임을 가르쳐주는 불필요한 짓을 할 필요가 없었다. 테무진은 ‘우리가 너네를 압박해 포위망을 좁히고 있다’는 사실은 착실히 알려주면서도, 나코 벼랑 주변 일대에 뿌려놓은 병사들을 결집시키지도 않았고 진격시키지도 않았다.
즉 테무진은 매복과 수색을 결합했다. 전군의 병사들은 훈련받은 신호체계(앞서 간 사람들이 남겨놓은 표식, 소리나는 화살인 효시, 저음 발성법인 후미 등)대로 정보를 교환하고 명령을 하달받으면서 착실히 포위망을 좁혀나갔다. 물론 어떤 아르반은 수풀에 숨은 채 모닥불을 지나치게 많이 피우거나 움직이는 소리를 크게 내 군세를 과장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천 명 단위 부대인 어느 밍간은 소리 없이 적의 배후로 접근하는 식이다.

알타이 산맥

눈에 띄면 숨는다. 적이 추격하기 시작하면 매복군이 나타나 쓸어버리고는 다시 사라진다. 실제로 이 대목에서 <몽골비사>는 “빙빙”이라는 경쾌한 표현을 사용한다. 그냥 직선으로 벼랑을 향해 올라가는 게 아니다. 각 부대마다 위치를 수시로 바꿔가면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러면서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압박한다. 그런가 하면 테무진 군의 동태를 파악하러 내려보낸 전초병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필시 매복에 걸렸을 테니까.
회전의 대패 직후에 벌어진 일이다. 당연히 나이만 군사들은 패닉상태에 빠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목이 조여 오는 심정은 나이만 군사들을 전투불능으로 만들었다. 차라리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우격다짐 싸워서 결론이라도 내면 좋겠는데, 테무진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빽빽한 숲에선 전술이고 뭐고 없다. 백병전의 비율도 높아진다. 싸우면 어쩔 수 없이 희생자가 생긴다.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하며 적을 물리칠 수 있다면, 훨씬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더라도 비효율을 감수하는 게 테무진의 신조였다. 공간압박과 심리전만으로도 충분했으므로 테무진은 나코 포위전에서 병사들이 본격적인 전투행위을 하는 걸 금지했다. 피 흘리지 않고 이기는 게 목표였다.
한편 나이만 군에 짙게 드리운 공포심리에, 하필이면 타양 칸도 제깍 감염되고 말았다.



타양 칸은 사령관으로 초빙된 나이만 군 2인자 격인 자무카와 함께 움직였다. 그는 넋이 빠진 상태였다.
“대체 어떤 인간들이길래 이리도 맹렬하고 빠르게 우리 군사들을 잡아 죽이는 걸까? 자무카, 당신은 테무진과 그 친구들을 가장 잘 아는 자가 아닌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 주라. 아까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 좌익과 우익을 맡았던 그 귀신 같은 네 명의 장수, 그 인간들 대체 정체가 무언가?”
여기서 자무카는 타양 칸에게 정이 뚝 떨어졌다. 원래부터도 ‘등급이 떨어지는 수컷’은 거리낌 없이 경멸하던 마초가 아닌가. 자무카는 자신이 삼류 군주와 연합하고 있다는 사실에 환멸을 느꼈던 것 같다.
여기서부터 자무카가 타양 칸을 놀려먹는 대목이 시작된다. 널 이긴 인간을 그토록 무서워한다면, 더 무섭게 해 주겠다는 경멸 섞인 조롱이 아니었을까. 그는 테무진과 그의 부하들에 대한 온갖 과장을 타양 칸에게 쏟아낸다. 이하의 상상력 넘치는 표현들은 기록된 사료를 적혀있는 그대로다.
“아, 저 ‘네 마리 개’ 말이지. 테무진이 끔직이도 아끼는 심복들이지. 정말 들개 같은 놈들이야. 얼마나 광폭한지 그냥 풀어서 키우질 못하고, 평소에는 테무진이 사슬에 채워 가둬 놓는다고. 그냥 가둬 키우는 게 아니라 인육을 먹여 키우지. 그러다 전쟁이 벌어지면 비로소 사슬을 풀어주지. 그러면 사람 고기 맛을 보려고 적들을 살육하는 자들이야.
이름이 어떻게 되냐 하면, 테무진이 새끼 때부터 사육한 노예견 젤메, 그놈의 동생 수부테이, 전쟁포로로 붙들어 키운 개 제배, 그리고 충견 쿠빌라이야. 테무진이 나이만 사람들의 인육 맛 좀 보라고 오랜만에 사슬을 풀어주었으니, 저리도 기뻐 날뛰는 게 아니겠는가?”
마치 판타지 소설을 읽는 듯하다. 자무카의 상상력과 언변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타양 칸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까?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타양 칸은 식겁했다.
“그럼 아까 전투에서… 이상한 놈들이 있던데. 그 백병전 잘하는 놈들 있잖아. 어떻게 활도 안 쏘고 그렇게 사람들을 죽이지?”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 ‘종심타격’을 하느라 측면이 취약해진 테무진을 육박전으로 보호했던 망구트족과 오로이드족에 대해 물은 것이다. 자무카는 테무진 편에 붙은 이 두 부족과 세 번이나 싸웠다. 원래는 자무카 휘하에 있던 부족들이었다. 테무진을 제외하면 자무카만큼 그들을 잘 아는 이도 없었다.
“오로이드와 망구트라는 자들인데… 창과 칼의 달인들이지. 찌르고 베고 때려서 적의 피로 초원을 물들이는 인간들이다. 이놈들도 테무진이 오랜만에 전투를 시켜주니, 사람 피맛을 보려고 미쳐서 날뛰는 거다.”
“저 괴물들의 수장이 테무진 아닌가? 당신과는 안다 사이라고 들었는데…”
“아, 내 친구 테무진 말이지. 쇠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가공할 냉혈한이야. 아까 전투하는 거 봤잖아?”

여기서 자무카는 타양 칸에게 개인적인 복수를 한다. 타양 칸과 나이만 조정은 ‘촌스런 몽골놈들’을 줄기차게 무시해왔다. 그런데 나이만과 연합한 자무카도 몽골족이다. 별일 아니니 그냥 꾹 눌러 참았겠지만 한 마디쯤은 해줘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 자무카의 군대와 연합한 당신들 나이만 사람들은 몽골을 그렇게도 무시하더니… 말로는 새끼 염소의 종아리 가죽만큼도 남아나질 않게 하겠다고 큰소리 치더니, 두 눈으로 똑똑히 봐라. 지금 당신들이 어떻게 됐는지. 응?”
염소는 다리가 얇은 동물이다. 새끼 염소는 더 얇다. 거기에 붙은 가죽이라는 건 찢어발긴 조각이라는 뜻. 다시 말해 새끼염소의 종아리 가죽처럼 만들겠다는 건 ‘발라버리겠다’는 뜻이었다.
타양 칸이 거짓말 말라며 군사를 수습하는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자무카가 주는 겁을 고분고분 집어삼키자, 자무카는 계속해서 그를 가학적으로 조롱한다.
“저기 그럼, 테무진 뒤에서 그… 중앙군을 통솔하던 놈은 대체 뭐지.”
“어휴, 그 놈은 말야, 카사르라는 놈인데… 테무진의 동생이지. 헐룬 ‘에케’가 쟤를 어떻게 키웠냐 하면…”
자무카는 테무진에게 완패해 자신의 미래가 송두리째 사라진 와중에도 헐룬을 에케(어머님)이라고 부르며 존대한다. 초원에서 안다의 어머니는 곧 자신의 어머니다. 자기보다 한 항렬 높은 어른이니 높여 부르는 건 이상하지 않다. 13익 전투에서 테무진 군의 총사령관을 맡았던 이가 헐룬이다. 헐룬과 그녀의 아들 테무진을 안드로메다로 보낸 게 자무카였고. 그래도 기본적인 예의는 잃지 않았던 것이다.
자무카는 자신의 안다인 테무진은 피에 굶주린 괴수처럼 표현하지 않았다. 동등한 형제이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테무진의 동생은 곧 자신의 동생이므로, 손아래사람인 카사르에 대해서는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한다.
“…원래 이름은 주치인데, 별명으로 붙은 카사르(야수)를 본명 대용으로 쓰고 있는 놈이지. 왜냐하면 태어날 때부터 괴수의 형상을 하고 나왔거든. 헐룬 에케는 저놈을 인육을 먹여 키웠다. 사람을 산 채로 씹어먹는데, 한 명 정도는 먹어도 성이 안 차는 미친놈이야. 힘은 당연히 천하장사고, 게다가 어찌나 명사수인이지!”
인육 먹는 식성은 과장이지만, 그래도 다른 부분은 근거가 있다. 실제로 카사르는 장사에 명사수였다. 서구 학자들은 자무카의 환상적인 묘사에서 게르만 서사시와 공통점을 발견한다. 실제로도 매우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래서 자무카의 실제 대사가 아니라 창작물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즉, 테무진이 적에게 공포를 심는 심리전을 위해 일부러 퍼트린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를 자무카가 말한 양 각색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자무카의 말솜씨는 <몽골비사>의 전반적인 문투와 크게 벗어나 있다. 몽골인들이 서사시 풍의 기록을 좋아했다면 그게 왜 자무카의 대사에만 있을까? 자무카가 서사시 풍의 과장을 한 건 맞다. 이는 자무카의 심리상황을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몽골비사는 문장을 시적으로 압축하는 경향이 있다. 자무카가 타양 칸에게 한 말도 그렇게 압축되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또 오컴의 면도날을 제안한다. 자무카가 그런 말을 했다고 기록되었으면, 그렇게 믿는 편이 가장 합리적이다.
이런 생각의 결정적인 단초는, 바로 테무게에 대한 자무카의 설명이다.
“후속부대를 지휘한 놈은 대체 뭐하는 인간인가?”
“아… 쟤는 테무게라는 앤데, 테무진의 막내동생인데 음…”
자무카는 테무게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버로우를 탔다. 과장을 하려 해도 과장할 근거가 없을 만큼 테무게는 특별한 재능이 없는, 전사가 아닌 평범한 생활인이었기 때문이다.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 그가 맡은 예비마 후속부대는 누가 해도 실패할 건덕지가 없는 역할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한테나 맡기기도 뭐하니 테무진의 혈육을 일종의 상징으로 세운 것일 뿐.
“저 친구는 애가 좀 게을러서…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놈이긴 한데, 뭐랄까… 그래도 뭐, 행군할 때 낙오하는 놈은 아냐. 여러 사람이랑 같이 있을 때 눈에 확 띄게 처지지는 않지. 어험, 험.”
이 태도를 과연 창작이라고 볼 수가 있을까?
테무게의 바로 손윗형, 즉 헐룬의 셋째 아들 카쥰 역시 깨끗한 생수처럼 아무런 강점도 별다른 특징도 없는 순결한 인물이었다. 몸이 병약해 요절했지만, 천재적인 아들 ‘알치다이’를 남겼다. 테무진은 이 조카를 굉장히 사랑했다.
여튼 테무게 대목에서 김이 확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타양 칸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그렇다면 더 높은 곳으로 도망가자!’
아니, 어차피 벼랑에 갇혔는데 더 높은 데로 도망가서 뭘 하려고? 그럴 거면 차라리 항복 협상이라도 하는 편이 낫지 않나? 안심할 시간을 한 시간만 더 벌자는 건가… 자무카는 타양 칸의 상황 판단에 또 한 번 어이를 상실했다.
패배한 자무카는 이제 마지막 결정을 내려야 했다.



자무카는 승복했다. 테무진의 승리를 인정했다. 그는 타양 칸과 함께 고지대로 퇴각하는 걸 거부하고 소수의 인원만 데리고 테무진 군의 포위망을 빠져나왔다. 그가 데리고 있던 몽골족은 테무진이 몽골을 통일할 수 있도록 남겨 놓았다. 자신의 출신 씨족인 자다란도 이끌고 가지 않았다. 가족도 남겨 놨다는 얘긴데, 그만큼 테무진에 대해선 믿는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다.
제 19편 ‘사막의 폭풍’에서 테무진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자무카가 아무 것도 없이 초원에서 퇴장할 차례였다.


자무카는 테무진을 걱정했다. 더 이상 싸울 이유도 조건도 사라진 지금 그에겐 테무진에 대한 우정만 남아있었다. 그는 타양 칸이 혹여라도 테무진을 이길까 우려했다. 군주부터 일개 병사들까지 공포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서 그렇지, 나이만 군은 아직 충분했다. 게다가 결집되어 있다. 나코 벼랑 주변에 산개한 테무진 군의 띠 어느 한 곳을 집중타격한다면 전세를 뒤집는 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전술가 자무카의 눈에는 그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 보였을 것이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엔 라이벌을 대하는 마초의 자존심도 있었을 거라 본다. 즉 테무진은 패배하더라도 나 자무카에게만 패배해야 한다는 그런 심리. 자무카도 몽골족과 초원을 동시에 통일하려고 싸워온 남자다. 자신이 실패한다면, 그 대업을 이룰 사람은 테무진이 아니면 안 된다. 타양 칸 따위가 기회를 잡는 꼴은 볼 수 없다는 그런 이중적인 마음이, 과연 없었을까.
자무카는 나코 벼랑을 떠나면서 테무진에게 사자를 보냈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테무진을 ‘형제’라고 부르면서 나이만 군의 정보를 모두 알려준다. 병력의 수와 위치, 이동 경로. 그리고 타양 칸이 공포에 질려 판단력을 상실했다는 것. 또한 말단 병사들에까지 공포가 전염돼 심리적 공황상태라는 것. 응원의 메시지도 담았다.
“형제여, 이겨내라!”
자무카에게서 적의 군사정보를 모두 넘겨받은 테무진. 이제 더 이상 조심할 이유도, 지체할 이유도 없었다. 테무진 군의 전사들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 결집했다. 그리고 나코 벼랑 끝에 갇힌 적군을 빽빽이 포위했다. 날이 저물자 그 채로 잠자리를 깔고 숙영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최후의 결전과 대량 학살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노골적인 신호였다.


이 신호에 나이만 군은 속았다. 날이 밝으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 한밤 중, 괴물들의 도륙에서 도망가야 한다는 심리에 사로잡힌 나이만 군사들이 앞다투어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벼랑이다… 벼랑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을뿐. 마치 집단자살을 하는 레밍처럼, 나이만 군사들은 서로 밀려 벼랑에 떨어졌다. 밤새 떨어져 죽은 병사들의 몸이 ‘썩은 통나무가 쌓이듯’했다.
이 상황을 모두 모니터링하고 있던 테무진은 아침이 되자마자 최종 포위섬멸전을 준비, 그날로 전군을 벼랑 끝으로 진격시켰다. 간밤의 참사에서 살아남은 나이만 잔여병력에게 희망은 없었다.



테무진에게 최종적으로 패배하고 자무카도 사라진 지금… 반 테무진 연합에 섰던 몽골족들은 이제 더 이상 도망갈 수도, 그럴 명분도 없었다. 몽골족들이 일제히 귀순했다.
타이치우드, 자다란, 기타 등등… 테무진을 그토록 괴롭힌 ‘형제’들이었다. 특히 이 몽골족 중에서도 타이치우드는 소년 테무진을 붙잡아 노예로 삼고 학대한 인간들이 아닌가. 테무진은 타이치우드족과 싸워 이겼었지만, 잔여세력이 남아 자무카와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테무진은 모든 적들을 조건 없이 받아들였다. 이 전투로 인해 초원이 통일된다. 이제부터는 모두가 공존해야 할 한 백성이다. 테무진은 이 시점에서 더없이 훌륭하게도, 복수를 깨끗하게 접는다. 나이만 병사들도 속속 항복했다. 테무진 군은 그들이 항복하는 대로 재빨리 귀순시켰다. 군대와 함께 이동하던 백성들도 ‘거둬들였다’. 테무진의 처가인 옹기라트족-보르테의 출신 부족- 일부도 아직 자무카 편에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이들도 사돈 사이인 몽골족과 함께 테무진에게 귀순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테무진은 불필요한 살육을 자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타양 칸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나이만 대장군 ‘수베치’는 포위된 상태로 소수의 정예병을 이끌고 끝까지 항거했다. 그는 항복을 거부한 병사들과 함께 나이만의 장수로서 명예롭게 죽을 생각이었다. 죽음을 전제하고 싸우자 그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테무진은 수베치의 저항군을 섬멸하는데 무진 애를 먹어야 했다.
그러다가 테무진은 수베치의 비장함과 용맹함에 감탄하고 만다. 비록 쿡세우 사브락만한 지장은 아니었지만, 멸망하는 조국과 함께 사라지겠다는 애국심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테무진은 전투를 중지하고 수베치에게 전갈을 보낸다.
“이보게, 어차피 모든 게 끝나지 않았나. 이제 통일된 초원에서 함께 사는 건 어때! 당신들 목숨을 다 살려줄 테니 항복하시게.”
수베치의 대답은?
“조까.”
테무진은 포기하지 않고 또 전갈을 보냈다.
“야! 이대로라면 어차피 너네 다 죽는다니까! 이미 망한 나라를 위해 죽는 이유가 대체 뭐야? 특별 대우 해주면 될 거 아냐! 상도 내리고 중요한 장군으로 중용할게! 더 이상 죽지 말고 빨랑 항복해!”
그러나 수베치는…
“조국의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진 대장군으로서 책임을 지고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 자 어서 빨리 군사를 더 투입해 우리를 섬멸해라!”
그럴수록 테무진은 수베치라는 인물에 더 매혹될 뿐이었다. 테무진의 새로운 사회시스템을 거부하고, 자신이 속한 전통사회를 위해 죽겠다는 게 엄청 구식이긴 하다. 그러나 아무리 구식일 지라도, 이 사람은 자신이 속한 사회와의 계약을 끝까지 지키려는 인간 아닌가? 테무진은 한 번 더 사자를 보냈으나 역시 거절당하고 만다.


이렇게 되면 더욱 맹렬하게 공격해 끝을 내주는 게 오히려 예의인 상황. 테무진은 수베치의 저항군을 에누리 없이 전멸시켰다. 수베치는 소원대로 최후의 나이만인으로 죽었다. 수베치가 죽은 후, 차키르마우트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나이만 잔여병력과 백성들도 테무진 울루스에 순순히 흡수통합되었다.
그러나 비열한 성격만큼이나 능력이 출중했던 젊은 영웅, 타양 칸의 아들 ‘쿠출룩’ 왕자는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이후 펼쳐지는 쿠출룩의 대모험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하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겠다. 테무진의 가장 골치아픈 적인 메르키트족도 톡토아 베키와 다이르 오손의 지휘 아래 튀는 데 성공했다. 이것들을 또다시 놓쳤다는 생각에 테무진은 머리가 지끈거렸을 것이다.
테무진은 수베치를 존경했지만, 포로가 되어 끌려온 여왕 구르베수는 전혀 존중해주고 싶지 않았다. 테무진에 대한 애정이 깊은 나로서는 정말 쓰기 싫은 대목이지만, 어쩌겠는가. 기록된 사실인 것을. 테무진은 그의 울루스를 모욕하고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한 보복으로 구르베수를 겁탈했다. 그것도 이런 말을 하면서.
“몽골인들의 몸에서는 악취가 난다며?”
즉 그 냄새 한 번 진하게 맡아보라는 얘기. 테무진이 적에게 이렇게 노골적이고 원초적인 보복을 하는 모습은 이때가 유일하다. 구르베수는 이미 중년을 넘은 나이로, 이성으로서 가진 매력도 없었을 것이다. 욕정 때문은 아니었다. 승전 직후의 상황이다. 여자를 차지하려면 테무진 만큼 좋은 조건인 사람이 없다. 하지만 테무진은 여자를 차지하는 일에, 특히 전리품으로 여성을 챙기는 데에 관심이 없었다. 나이만을 멸망시키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구르베수 겁탈은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며, 고의적인 보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테무진 울루스 사람들은 구르베수에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다. 병사와 백성들에게 심리적 보상을 해줄 필요가 있었다. 야만적인 승리의 쾌감일지라도 효과는 있었을 것이다. 내 상상이지만, 이 겁탈사건에 대한 테무진 울루스 병사들의 대화는 아래의 수준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잘난 체 잔뜩 하던 귀부인이 우리 칸 몸 아래서 다리를 벌리고 신음하는 걸 보니 속이 다 뻥 뚫리더라구!“
“우리 몸에서 냄새가 난다고 깔볼 땐 언제고, 처음엔 반항하더니 테무진 님의 물건이 너무 좋았는지 더 세게, 암 커밍, 퍽 미 이러면서 더 해달라고 난리도 아니었어.”
“아냐, 내가 듣기로는 테무진 칸의 물건이 너무 커서… 훌륭하신 분은 자지도 큰 법이잖아! … 아파서 제발 살려 달라고 울면서 싹싹 빌었다고 하더라구.”
“칸께서 일발 발사를 하신 후 축 늘어져 있는 그 요망한 년한테 근엄하게 한 마디 하셨다지. ‘아직 두 번 남았다. 나는 아직 배고프다’고.”
이게 전부였다. 이 외에는, 테무진은 휘하 군사들에게 승전의 대가로 줄 게 없었다. 이제 그들과 동등한 백성이 된 나이만 사람들의 신변과 재산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죽은 적병의 무장과 물건 따위야 분배 대상이 되었겠지만 그걸로 충분할 리가 없다.
구르베수한테는 굉장히 안 된 일이지만, 복수의 대상을 그녀 하나로 압축 시킨 건 나이만 백성들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그 덕에 전 인구가 전쟁의 책임에서 벗어났고, 무엇보다 나이만 백성들도 폭정을 일삼던 구르베수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이후 구르베수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기록되지 않는다. 죽든 살든 결과가 별로 좋지는 못했을 것 같다.
전쟁에 패했음에도 평화롭게 백성으로 편입되고 생명과 재산을 존중 받은 나이만인들. 우리는 십여 년 후 시작되는 세계정복전쟁에서 출중하고 충성스러운 나이만 출신 장군들을 발견하게 된다. 테무진 울루스 사회는 이들에게 정말로 공정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타타르 출신 장수들도 많이 활약하게 된다. 투르크족의 한 지파에서 역사가 시작된 나이만족과 타타르족은 인구가 많았기 때문에, 인재도 많이 배출하는 게 당연하긴 하다.


참, 나코 공략이 끝난 후 테무진은 평소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한 사람을 득템하는 데 성공했다. 바로 나이만 조정에 초빙돼있던 위구르인 재상 ‘타타통아'였다. 전쟁 포로로 테무진 앞에 끌려온 그는 적장의 환대에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타타통아, 내 그대 이야기는 많이 들었소! 직장이 망했다고 고향에 갈 생각은 접으시구랴.”
테무진은 일자무식이었지만 소위 학자라 불리는 이상한 인간들의 머리에서 뭔가 좋은 게 나온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나이만도 똑같은 문맹집단이었지만 외국인 학자를 초빙해 행정을 맡기는 센스는 있었다. 몽골초원보다 훨씬 세련된 문명을 경험해본 위구르에서 배출된 학자 타타통아. 그는 초원 유목민 국가의 ‘국정'을 관리해 본 경험이 있었다. 또한 위구르족의 유목문명 역시 초원 유목문명과 뿌리가 같다. 위구르족은 제국을 경험해보았지만, 유목민의 생활 방식을 훼손하지 않은 특이한 민족이다.
테무진은 나이만족까지는 하나의 문화공동체로 묶여야 할 ‘우리'로 파악했다. 테무진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모전 벽의 사람들'이다. 위구르부터는 ‘남’이지만,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남이며 우리가 배워야 할 남이라고 봤다. 기마민족이 힘을 키워 정복사업을 하다보면, 정주문명의 영향을 받아 문화수준이 발전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변질의 과정이기도 하다. 결국 기마민족 특유의 기동력과 활동성을 잃고 고향으로 쫓겨가거나, 문화적 정체성을 잃고 피정복민들에게 흡수되어 종족이 사라지곤 한다.
테무진은 위구르족을 자신의 울루스가 어디까지 발전하고 어느 수준에서 변질을 막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모델로 삼았다. 초원을 통일하고 새로운 나라를 출범해야 하는 테무진에게 타타통아의 경험은 놓칠 수 없는 전리품이었다. 테무진은 문맹이었지만 국가행정을 하려면 문자와 서류가 필요하다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타타통아가 보통 수준의 학자가 아니라는 것도 역시 알고 있었다.


여하튼 나코 공방전 직후 타타통아를 잽싸게 낚았다는 것은, 테무진이 나이만 정벌을 초원통일과 새로운 국가 건설로 가는 마지막 관문으로 여겼다는 분명한 증거다. 타타통아는 몽골제국 최초의 문신, 최초의 재상으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된다. 여담이지만 강제로 재상이 된 타타통아에게 떨어진 최초의 임무는 바로 테무진 가족에게 위구르 문자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위구르어와 초원 언어는 가까운 사투리였고, 위구르어는 표음문자 즉 일종의 알파벳이었기 때문에 위구르 글을 안다면 몽골어도 읽고 쓸 수 있었다. 다들 위구르 문자 읽고 쓰기에 성공했지만, 낙제생이 하나 있었다. 안타깝게도 테무진 본인이었다. 타타통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테무진은 죽을 때까지 문맹으로 산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저렴한 테무진의 언어 능력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리라.
전후 처리가 끝나가고 있었다. 테무진이 어떤 기분이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얼마나 북받쳐 올랐을까.
그는 방금 초원을 통일했다.




하지만…
그 지긋지긋한 메르키트족이 여전히 건재했다. 테무진과는 순도 100%의 증오로 뭉친 원수 중의 원수. 예수게이는 메르키트족에 시집가는 헐룬을 납치해 결혼했다. 그 덕에 테무진은 역으로 아내를 빼앗기는 보복을 당했다. 테무진이 아내를 되찾는 과정에서 자무카가 지휘한 연합군은 메르키트를 박살냈다.
그때, 이만하면 저들도 충분히 고통을 받았으니 제발 그만 하자고 자무카와 옹 칸을 말렸던 게 다름아닌 테무진이다. 전사가 아닌 순진한 목동의 생각이었다. 그때 뿌리를 뽑았어야 했다고, 테무진은 얼마나 후회했을까. 테무진의 만류로 살아남은 메르키트족은 이후 언제나 반 테무진 연합의 선봉에 섰으며, 포기를 모르고 저항했다.
탁월한 능력가인 나이만의 쿠출룩도 살아남았다. 아직도 소수의 적들이 테무진 주변을 배회하며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갓 초원을 통일한 테무진은 새로운 초원유목국가를 출범시킬 여유가 없었다. 통일을 활용하려면 먼저 통일을 ‘굳혀야’ 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토벌전이 이어졌다.
초원을 통일한 해인 1204년 가을. 초원 바깥으로 쫓겨간 메르키트족이 다시 초원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고향이자 근거지인 ‘사아리’ 초원에 자리를 깔았다! 명백한 도발행위였다. 대체 뭘 믿고 이런 짓을 했을까. 간단하다. 고향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압도적인 군사가 몰려오면 튀면 그만이다.
즉 메르키트족은 게릴라전을 벌이며 테무진을 지근거리에서 괴롭히는 ‘레지스탕스’가 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테무진 군대의 수준을 너무 얕봤다. 메르키트족은 테무진 군대의 신속하고 정확한 기동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래서 레지스탕스임에도 순식간에 포위되고 말았다. 오히려 테무진은 지금이야말로 메르키트를 절단낼 기회라고 무릎을 쳤을 것이다.
메르키트 게릴라군은 무참히 패배했다.


메르키트족은 원래 3개 씨족 연합체였다. 부족연합체로 봐도 무방하다. 1. 톡토아 베키가 이끄는 오도이드 메르키트 2. 다이르 오손이 이끄는 오와스 메르키트 3. 카아타이 다르말라가 이끌던 카아드 메르키트. 자무카가 지휘한 ‘킬코 강 도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카아타이 다르말라는 죽고 카아드 메르키트는 와해되었다.
2개 씨족집단만 남은 메르키트족은 열악한 조건에서 수십 년 간 테무진에게 저항하느라 지쳐갔다. 워낙 싸움을 잘 해 군소 부족, 씨족들을 족쳐 물자와 사람을 빼앗아 생존하는 군사집단이 되었지만… 한계라는 게 있다. 부족민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 자무카 편에 붙어 카라칼지드 사막 전투에서 이겼을 때 빼고는, 테무진에게 번번이 패배했다. 그리고 이번에 또 졌다.
이러다 보면 복수의 칼날도 녹슬게 된다. 살아남은 지도자 톡토아 베키와 다이르 오손도 유랑민이 된 부족민들을 이끌며 늙어만 간다. 톡토아 베키는 끝까지 테무진에게 대항하다가 죽을 생각이었지만, 오와스 메르키트를 이끌던 다이르 오손은 결국 항복을 선택했다.
다이르 오손이 항복한 이유가, 그의 의지가 꺾이고 지쳐서라고 생각하는 건 공정치 못하다. 그는 부족민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지도자다. 자신의 결정에 의해 출신 부족이 지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굴욕적인 항복을 하는 것과 자기 종족을 지치고 굶주리다 소멸케 하는 것. 어느 편이 지도자로서 현명한 선택이겠는가.
다이르 오손은 패배한 적들을 백성으로 받아들이곤 했던 테무진의 관용에 한 가닥 기대를 걸었다. 그는 자기 딸을 테무진에게 보내기로 했다. 물론 그녀와 결혼해주길 바라면서. 사돈이 되겠다는 뜻이다. 친족관계를 맺어 보호받고, 존중받겠다는 것. 따라서 부족민들도 지키겠다는 것이다.
당시 초원에서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되지도 않는 소리였다. 전리품으로 차지해 첩으로 삼는다면 모를까, 정식으로 결혼해 동등한 사돈 관계가 되자고? 한 줌의 백성밖에 남지 않은, 싸움에 진 철천지 원수가? 다이르 오손의 딸의 운명은 메르키트를 지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테무진의 결정에 맡겨지게 된다.
글타. 다이르 오손에게 딸은 ‘버리는 카드’였다. 아버지로서 당연히 딸을 사랑했겠지만, 부족민 전체의 삶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위해 혈육을 투척한 것이다. 다이르 오손의 심경은 참으로 비참했을 것이다.
톡토아 베키가 가족들과 소수의 오도이드 메르키트 군사만 챙겨 전장을 빠져나가는 동안, 오와스 메르키트의 전사들은 활과 창을 내려놓았다. 다이르 오손은 딸 ‘콜란’을 데리고 테무진이 있는 곳을 향했다. 그러다가 그만 한창 메르키트군을 섬멸하고 있던 테무진 군의 병사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저거 다이르 오손 아냐? 죽여버려! 옆에 있는 딸년도 같이 썰어!”
메르키트족은 테무진에게 너무나 지겨운 원수라, 휘하 병사들의 그의 증오심에 감염되어 있었다. 테무진은 메르키트족이 귀순하거나 항복할 가능성을 0으로 보고 있었다. 하긴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다. 그래서 일반 병사들도 메르키트족을, 테무진이 갓 통일한 초원의 암적 존재로 보고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있었다.
“잠깐 기다려봐! 저 노인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아무 이유 없이 자기 딸을 데리고 우리 병사들이 있는 곳을 지나칠 리가 없잖냐!”
갑자기 나타나 다이르 오손을 구원해준 것은 바로 테무진의 부하장수 ‘나아야’. 우리는 지난 15편 ‘패자의 역습’에서 그의 첫 등장을 목격했다. 상황판단이 빠른 나아야는 다이르 오손과 콜란을 챙겨 이유부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요?”
“나와 오와스 메르키트는 저항을 그만 두고 항복하기로 했소. 그래서 테무진 칸이 내 딸과 결혼해 우리의 안전을 보장 받고 싶어서 딸애를 데리고 가는 중이었소.”
“음… 우리 테무진 칸이 당신과 딸을 어떻게 할 지는 그분 마음이고, 여튼 나는 당신들을 고이 데려가야 하는 임무가 생겨버렸구만. 그런데 너무 위험해. 당신들은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메르키트족의 수장과 카톤 아니요. 우리 병사들이 가만 두지 않을 거요. 지금 난장판입니다. 죽이고 뺏고 불태우느라고…
우리 병사들은 당신들을 보자마자 바로 죽여버릴 겁니다. 젊고 예쁜 당신 따님은 죽기 전에 아마 겁탈을 당할 거고. 내가 말린다고 해야, 그 아수라장에서 내 목소리가 들리겠소? 나만 믿고 따라오시오. 이 소란이 가라 않을 때까지 안전한 곳에 짱박혀 있읍시다.”
사정이야 어쨌든 자기 보스인 테무진의 장인과 부인이 될 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나아야는 안전에 안전을 기하기 위해 사흘 간 짱박혀 있었다. 그러나 테무진은 이미 소식을 접수한 상태였다. 다이르 오손과 그의 딸이 자기에게 오고 있다가 나아야를 만났다. 그리고는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




테무진으로서는 나아야를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콜란을 자기가 차지한 게 틀림없다! 아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메르키트족의 사위가 되어서 자신을 배신하려고 그런 건가? 이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테무진은 놀랍게도, 다이르 오손의 항복 요청을 조건 없이 수락할 생각이었다. 그는 초원을 통일하는 시점부터 개인적 복수를 잊었다. 이제부터는 초원이 통합되면 그만이다. 피를 덜 흘리고 평화적으로 갈등을 해결할 수만 있으면 OK였다. 이제 막 초원 유일의 대칸이 된 사람으로서 몹시도 모범적인 태도였다.
그런데 나아야 이 새끼가 욕정에 미쳐 그 그림을 망쳐 놓다니! 테무진의 뚜껑이 활짝 만개한 건 너무나 당연했다. 마침내 나아야가 두 사람을 데리고 나타나자, 테무진은 곧바로 나아야를 심문했다.
“저 새끼 끌어다 놓고 작대기 가져와!”
얼이 빠져 끌려온 나아야를, 테무진은 ‘널 조져주마’하며 몰아세웠다. 당시 정황을 보건대 아마 몇 대는 맞았던 것 같다. 우리 나아야, 씨바 얼마나 아프고 억울하겠는가? 그의 호소는 정말 리얼하다.
“칸! 제 충성을 의심하시다니요… 정말 너무하십니다! 내가 칸에 대한 다른 얼굴(마음, 행동거지)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다. 제가 칸을 어떻게 생각하고 살았는데요! 제가 어떻게 충성을 했는데요! 제가 칸이 생각하는 그런 개새끼라면 확 죽어버리겠습니다!”
콜란이 생각해도 나아야가 무척 불쌍했나 보다. 그녀는 곧 남편이 될지도 모르는 테무진에게 나아야는 죄가 없고 오히려 우리 부녀의 은인이라는 상황 설명을 쭉 해 주었다. 그리고는 대담하게도 강수를 던졌다.
“정 의심스러우시면 하늘의 뜻에 따라 부모가 낳아 주신 내 살을 직접 조사해 보시지요.”
살 조사라. 무슨 뜻일까? 부모가 낳아준 상태 ‘그대로의’ 살이다. 그리고 하늘 즉 운명이 결정하는 것은 바로 남녀의 ‘성별’이다. 즉 자신의 처녀성 검사를 해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콜란은 성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하룻밤 자 보면 나아야의 결백을 믿게 될 거라는 얘기. 이건 다시 말해, 한 번 몸을 섞으면 자동적으로 부부 관계가 되니 당신은 사돈 사이가 되는 우리 오와스 메르키트의 백성들을 살려주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건 뭐 화끈하다고 해야 하나… 나훈아의 팬티 퍼포먼스를 연상케 하는 박력이 느껴진다. 패배한 부족장의 딸이 이 정도 침착함과 배짱을 보였다는 데서 콜란의 범상치 않은 성격이 짐작된다.
콜란이 이렇게 나오면 테무진도 더 할 말이 없다. 일단 나아야를 풀어주고 상황을 조사해보니, 그날이 가기도 전에 나아야의 결백이 증명됐다. 아 씨바… 이거 모양 떨어지게 생겼다. 테무진은 인간적인 실수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실수를 수습하는 데는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 간단하다. 실수를 선선히 인정하는 것이다. 테무진은 최고 권력자가 되어서도 이 좋은 버릇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테무진은 나아야가 옳고 자신이 틀렸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테무진은 사실관계 앞에서는 권위의식이 없는 사람이었다. 상당히 쪽팔린 일이었겠지만 그걸 꾹 눌러 참을 줄 알았다. 이런 품성은 인정받아 마땅하다. 테무진은 나아야에게 상도 챙겨주었다. 미안한 감정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정치적 결혼이었지만 콜란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테무진은 주변 여성에게 매우 부드러운 타입의 남자였다. 하긴 자무카도 아내의 잔소리에 시달렸다고 하니 이게 두 안다의 공통점일 수도 있겠다. 그와 관련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역사를 보면 테무진이 대차고 직설적인 여성에게 반하는 경향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보르테가 화를 낼 때면 그녀의 말을 재깍 따르던 모습도 오버랩된다.
오와스 메르키트가 귀순하고 이제 남은 것은 톡토아 베키가 이끄는 오도이드 메르키트 뿐이었다. 나이만 출신 백성과 메르키트 귀순자를 통합한다는 상징으로 무척 좋은 카드가 테무진의 눈에 띄었다. ‘투레게네’라는 여성이었다.
투레게네는 원래 나이만 여성이었다. 그녀는 나이만 귀족 치고는 참 특이하게도 예수님이 아니라 노자와 장자에 심취해 있었다. 투레게네는 원래 메르키트 귀족 전사에게 시집을 갔었다. 나이만과 자무카가 반 테무진 세력으로 뭉쳐 있을 대, 메르키트족도 자무카의 휘하에 있었다. 이럴 때 꼭 연합 세력 간에 정략결혼이 벌어지게 되는데, 아마 투레게네도 이때 메르키트족 전사와 결혼했을 것이다.
투레게네의 남편은 1204년 가을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 같다. 테무진 울루스는 언제나 이렇게 발생한 과부와 고아들을 부양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곤 했다. 가장 이상적인 부양 방법은 테무진 울루스에 속한 남성과 재혼시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고아들의 생활을 울루스가 책임져야 하기에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다.


테무진은 도장사상 매니아인 이 독특한 아줌마, 투레게네의 재혼 상대로 자신의 셋째 아들 우구데이를 낙점했다. 지도자의 아들이, 나이만인이기도 하고 메르키트족이기도 한 전쟁과부를 책임진다. 일타쌍피의 롤모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무려 왕자씩이나 되는 우구데이 입장에선 불공평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우구데이에게도 원래 아내가 있었다. 그는 첫째 부인 사이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자식을 보려면 다른 아내가 있어야 했다. 전쟁과부와 유부남(우구데이는 돌싱이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첫 아내도 따로 재혼했을 것이다.)의 재혼이니 누가 손해랄 것도 없었다. 그리고…
훗날 투레게네는 톨루이(테무진의 막내아들)의 부인 소르칵타니와 몽골제국의 경영권을 놓고 피도 눈물도 없는 싸움을 벌이게 된다.



테무진은 이제 메르키트를 완전히 흡수하든가, 박멸하지 않으면 초원 통일 사업을 완수한 게 아니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는 추격 섬멸대를 꾸려 톡토아 베키가 이끄는 오도이드 메르키트를 서쪽으로, 서쪽으로 추격했다. 필사적인 메르키트는 쉽게 꼬리를 잡히지 않았다. 어느던 추운 겨울이 왔다.
“저, 테무진 칸… 이제 초원으로 돌아가서 겨울을 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초원 유일의 대칸이 되셨는데 정치도 좀 하셔야 할 것 같고…”
“아니.”
테무진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우리는 놈들을 추격하면서 겨울을 난다.”
테무진의 추격대는 알타이 산기슭에서 겨울을 났다. 이듬해 1205년 봄, 다시 메르키트를 중앙아시아까지 쫓아갔다. 이제는 메르키트도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전열을 가다듬고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유랑을 하고 있던 나이만의 왕자 ‘쿠출룩’과 함께였다. 테무진의 심정은,
“오냐, 한 번에 정리해주마.”
정도였을 것 같다. 테무진 군대는 메르키트-쿠출룩 연합군을 또 한 번 박살 냈다. 톡토아 베키는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그러나 톡토아의 아들들은 살아남았다. 왕자들은 난리통에 아버지의 시신을 챙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두고 갈 수 없는 노릇. 그래서 급한 김에 아버지의 머리를 잘라 챙겨 부하들과 함께 도망갔다. 아마 나무인형과 조립해 안장하거나, 아니면 제단에 머리를 올려놓고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쿠출룩은 쿠출룩대로, 위구르족의 영역을 지나 카라 키타이(서요제국)로 도망쳤다.


그렇게 고생을 해서 톡토아를 제거했는데, 상황은 달라진 게 없다. 테무진은 안 하던 짓을 한다. 이례적으로 살육과 약탈을 허락한 것이다. 다이르 오손처럼 귀순을 한다면야 받아주겠지만, 근성가이 톡토아 베키는 그럴 가능성도 없었으니.
메르키트족 잔여세력은 동유럽 근방까지 도망갔다. 테무진도 더 이상 쫓아갈 수 없었다. 그때쯤 초원에서 소식이 들려왔다. 테무진 울루스가 흡수한 메르키트족 일부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반란은 현지에서 바로 제압되었지만, 테무진의 메르키트 노이로제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게 분명하다. 아아, 대체 나는 빼앗긴 아내 보르테를 되찾던 그날, 왜 이쯤에서 그만두자고 자무카와 옹 칸을 말렸단 말인가.
테무진은 초원에 돌아왔다. 그는 오직 전투만 생각하는 타고난 싸움 개를 한 마리 보내 메르키트 잔당들을 세상에서 싹 지우지 않으면 돌아오지도 말라고 할 생각이었다. 이 단순하면서도 집요한 임무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네 마리 개’의 멤버인 수부테이였다. 그러나 수부테이에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엄청난 대식가였던 수부테이는 고도비만 환자가 되어 있었다. 말이 그의 몸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기마민족의 장군으로서는 최악의 핸디캡이었다. 그렇다면 말 여러 마리가 끄는 수레에 태워 보내면 되겠다고 테무진은 생각했다. 하지만 거친 지형에서 군사작전을 수행하며 마구 달리다 보면 나무 수레는 금방 망가지는 법이다. 그리고 몽골의 수레는 작다. 수부테이의 거대한 몸을 싣고 달리면 더 빨리 망가진다.
그래서 테무진은 앞으로 수부테이의 트레이드 마크가 될 물건을 특별제작해준다. 철제 수레였다. 가난한 숲속 대장장이 출신인 수부테이는 자신보다 유복하게 자란 초원사람들에 비해 사냥과 스포츠에 취미가 없었던 것 같다. 가난한 노동계층은 몸을 움직이는 활동 전부를 노동으로 느끼는 경향이 있다. 또한 못 먹고 자란 사람은 식탐이 생기는 게 당연하다.
테무진이야 도덕적인 군주가 되기 위해 일부러 좋은 음식과 사치를 절제했지만, 수부테이는 그런 거에 관심 없었다. 뒹굴거리면서 질 좋은 고기를 끝없이 먹어 댔을 게 분명하다. 역사학자들과 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수부테이는 비만에 의한 성인병을 달고 살았다. 특히 당뇨가 심각했다.
철제 수레는 좋은 해결책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수부테이를 더 살찌게 한다. 말을 타는 일은 상당한 운동이다. 수레에 편하게 앉아 기마민족의 가장 기본적인 운동인 ‘승마’도 안 하게 되었으니 어찌 됐을지 뻔하다. 하여간 테무진도 수부테이만을 위한 요상한 쇠수레를 제작하면서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절제력이 강한 그였으니, ‘대체 이 자식은 왜 저렇게 끝없이 먹고 찌는 걸까’하는 생각쯤은 들지 않았을까.
테무진은 수부테이에게 단단히 이른다.
“톡토아의 아들들이 아무리 도망가도 쫓아가 없애라. 새가 되어 도망치면 독수리가 되어 잡아라. 물고기가 되어 숨으면 그물이 되어 건져 올려라.”
한 마디로 지옥까지 쫓아가라는 뜻.
수부테이는 전용 쇠마차를 타고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러시아 및 동유럽 지역을 휘젓다시피 하면서 마지막 남은 메르키트 잔당을 기어이 해치웠다. 그리고 다음 해, 1206년에 돌아온다. 그런데 나는 몽골비사의 연대를 그대로 썼지만, 학계에선 이 사건이 1216~17년에 일어났다고 보는 게 지배적이다. 고민 끝에 이야기 전개를 위해 수부테이의 쇠마차 투어를 지금 썼다.
어차피 한 가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수부테이는 언제가 됐든 독자적인 지휘권을 가지고 서쪽으로 원거리 출정을 해서, 메르키트족을 절멸시키고 왔다.
시간은 흐르고 1205년. 몽골 역사와 테무진은 이 해를 단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하게 된다. 바로 테무진과 자무카의 재회였다.



테무진이 자무카에게 패했을 때 19명의 전사와 함께 발주나 호숫가로 쓸쓸히 은퇴한 것처럼, 자무카도 몇 명의 부하를 데리고 초원에서 퇴장한 상태였다. 자무카의 부하들도 발주나 호숫가의 결사대처럼 자기 보스에 푹 빠진 남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무카를 따라나섰을 리가 없다.


두 안다는 어찌도 이리 비슷한지. 그러나 테무진과 자무카에겐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테무진이 드라마틱한 재기에 성공한 이유는 첫째, 19명의 결사대가 공유한 사회적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테무진은 군사력과 권력을 송두리째 잃었지만 초원 전체의 민심이 그의 편이었다.
자무카는 재능과 카리스마로 테무진을 압도했지만, 동시에 그보다 단순하고 원초적인 보스였다. 즉 지도자 자무카의 매력은 ‘강력한 수컷’이라는 점이다. 자무카는 이제 권력도 없었고 그 천재적인 군사적 능력을 보여줄 군대도 없었다. 자무카 무리는 목표를 잃고 헤맸다. 자무카의 부하들은 지쳤고, 더 이상 자무카를 존경할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하들은 때마침 사냥한 야생 염소를 자무카 몰래 먹고 있었다. 그러다 자무카에게 딱 걸렸고, 열 받은 자무카에게 구타당하고 만다.
“너네들이 개념을 상실했구나?”
얼핏 보면 자무카가 먹을 거 가지고 삐져서 꼬장 부리는 군대 병장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우리는 중세 초원 문화의 코드를 읽어야 한다.
지난 편들에서 누누이 설명했지만, 초원에는 ‘10분의 1세’라는 단순명쾌한 관습이 있었다. 음식이든 가축이든 약탈품이든 자신이 새로 얻은 모든 것의 약 10%를 보스에게 바치는 것이다. 보잘것없는 한 끼 식사라도 예외는 없다. ‘수입’을 가장 먼저 보스에게 보여줘 꿍친 게 없다는 걸 증명하고 10%를 떼이는 게 룰이다. <몽골비사>를 보면 부하가 주군에게 ‘가장 먼저 가져와 보여준다'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자무카가 무리의 보스로서 열 받은 건 당연하다. 이 사건은 초원 유목민 세계에서 그를 지도자로 인정할 사람이 단 한 명도 남지 않았음을 뜻하니 말이다. 배신과 구타로 주종 관계가 허물어진 그날. 자무카는 더 큰 배신을 당한다.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묶인 것이다.
초원이 모두 테무진의 것이었다. 초원 유목민이 초원 밖에서 살아 뭣하겠는가? 자무카의 부하들은 테무진의 라이벌인 보스를 잡아다 바치면 테무진이 초원에서 먹고 살 길을 마련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두둑이 상을 내려주지 않을까? 자무카는 테무진의 숙적이니 말이다. 그렇게 자무카는 테무진 앞에 끌려가고 만다.
자무카의 기분은 말할 수 없이 비참했을 것이다. 부하들에게 붙들린 몸으로 초원을 제패한 라이벌 앞에 던져진다는 것이… 자무카는 끈으로 묶였을 수도 있고, 테무진이 타이치우드족에 잡혔을 때처럼 칼을 쓰고 있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나 초원의 패권을 두고 경쟁한 친구에게 보여줄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러나 자무카는 역시 자무카였다.
나는 자무카라는 인물을 볼 때마다 테스토스테론의 생리적 효과를 생각하게 된다. 과도한 마초이즘은 대체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아주 가끔은 폭풍같은 간지를 뿜어내는 법. 자무카가 붙잡혀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테무진은 그야말로 깜딱 놀랐을 것이다. 진짜 자무카가 맞는지 확인하고 또 그를 안전하게 호송해오기 위한 요원이 출동했다.
테무진이 보낸 요원과 자무카를 체포한 일행이 만났다. 몸이 구속된 상태였을 자무카는 위축되기는커녕 테무진 측 요원에게 당당하게 말한다.
“테무진 형제에게 일러라! 나는 내 형제를 잘 안다. 나의 안다는 제 주군을 배신하는 것들을 인간취급하지 않는 친구지. 주인을 배반한 이 배신자 새끼들을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는지, 너희는 테무진에게 묻고 와라!”
아마 서너 명은 자무카의 말을 전하러 테무진에게 말을 달려갔을 테고, 나머지는 호송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자무카 일행을 억류하고 있었을 것이다. 메시지를 접한 테무진은 자무카의 뜻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그도 굴욕적인 모습의 자무카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내 형제로 하여금 그 배신자들을 직접 처단하게 해 주어라!”
이윽고 되돌아온 요원들이 자무카를 풀어주고, 칼까지 쥐어줬을 때 그를 배신한 부하들은 아연실색해졌을 것이다. 자무카는 그들을 가차 없이 베어 죽여버렸다. 그러고 나서 다시 묶이거나 무장해제가 됐을 리도 없다. 자무카는 당당한 모습으로,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고(그건 자신의 명예가 허락하지 않을 일이기도 했다.) 테무진 오르도 한가운데를 통과해 그의 게르로 다가갔을 것이다. 그 모습에 테무진 울루스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으리라.
“어…? 저건 자무카 아녀…?”
더 놀라운 장면은 테무진의 환대였다. 싸움이 끝난 두 안다 사이엔 우정만 남아있었다. 자무카는 테무진의 게르에 즉시 초대된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두 사람의 긴 대화는 몽골 역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 중 하나다. 상당히 긴 대목인데, <몽골비사>가 이 정도 길이로 밖에 압축하지 못했을 정도면 무척이나 오랜 대화를 나눈 듯 하다. 아마도 두 사람은 회포를 푸느라 밤을 지샜을 것 같고, 마유주도 양껏 곁들였을 것이다.

테무진은 두 사람이 언제 싸웠냐는 듯 먼저 말을 꺼낸다.

“우리 둘이 드디어 다시 만나게 되었다… 우리 예전처럼 다시 친한 친구가 되자. 이제 하나가 되어 함께 지내자.”

글타. 두 사람은 깊은 숲 속에서 세 번째 안다의식을 치른 후, 함께 동고동락하며 군사집단을 이끈 적이 있었다. 테무진은 옛날 생각이 난 것이다.

“이제부터는 우리 함께, 서로의 부족한 점을 지적해주고, 서로의 나태한 점을 질책해주며 살자.”

서로에 대한 죄책감을 토로하는 이어지는 대화는 정말 눈물이 날 정도다.

“자무카, 우리가 헤어져 있을 때도 나는 너를 사랑했다. 넌 참으로 소중한 나의 형제였어. 우리가 서로를 죽고 죽이려고 싸울 때… 나는 너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대의 ‘명치가, 심장이 아파'하게 만들었다…”

즉 ‘너의 가슴이 미어지게 했다'는 뜻. 자무카가 한 말을 보건데 그의 가슴은 정말 미어졌던 것 같다.

“테무진, 우리는 서로의 피를 나누어 마신 형제다. 우리는 잊혀지지 않을 우정의 말을 함께 나누었고, 밤에는 한 담요를 덮고 함께 잔 사이였지… 하지만 우리는 ‘마음에 못을 박는 말을을 주고받았'다.”

뒤이어 테무진과 사생결단의 경쟁을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언제나 있었던 그에 대한 그리움을 내보인다.

“너를 이겨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다시는 널 가까이 할 수 없었다. 내 형제인 너의 따뜻한 얼굴을 보지 못해 괴로웠다. 우리는 서로 못 잊을 우정의 말을 주고받은 사이였는데, 그런데도 서로 싸워서… 차마 민망해서 너를 친구로서 다시 보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우정을 확인하고 옛 이야기들을 끄집어낸다. 얼어붙은 오논 강에서 짐승의 뼈로 만든 스케이트를 타던 일, 함께 작은 새를 사냥하던 추억도 이야기했을까? 어쨌든 기록된 문장만으로도 눈물로 범벆된 밤이었음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자무카는 테무진에게 초원통일을 축하하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이제 형제는 ‘주위의 나라를 평정했다. 외방을 모두 합병했다.’ 이 초원에서 칸의 자리는 오직 너의 것이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나자 테무진은 슬슬 본심을 말하기 시작한다. 테무진은 자무카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죽이기는커녕 통일초원에 세워질 신흥국가의 주요 멤버로 영입하려고 했다.

“일전에… 카라칼지드 사막 전투 때 말야. 그때 자무카 네가 나에게 싸우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나? 오로이드족과 망구트족을 선봉으로 세우라고 해서 그대로 따랐지. 서로 싸우는 와중에서도 이렇게 날 도와주다니! 허허 참…”

제 19편 ‘사막의 폭풍'에 자세히 설명했지만, 테무진에게 힌트를 준 건 자무카의 전술이었다. 그리고 자무카는 카라칼지드 사막 전투에서 테무진을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렸다. 이 신호가 통했을 리가 없다.

“저기 테무진, 내가 그 전투에서 널 발라버린 건 생각 안 나냐…”

“그렇다면 이건 어때? 나이만과 싸울 때, 나코 벼랑에서 네가 나한테 나이만의 군사정보를 모두 넘겨주지 않았나. 그때 네가 타양 칸에게 겁을 잔뜩 줘서 나이만 군대가 공포에 짓눌렸지. 내 그때 너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다. 그러니까 너는 초원통일에 큰 공이 있는거야, 응?”

“야! 그거야 게임이 다 끝난 상태였으니까 그렇지…”

자무카에게 죽지 않을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는 자무카의 성격을 배려한 것이다. “살려주마!”하고 관대한 모습을 보이는 걸로 자존심 강한 자무카가 땡큐 하고 좋아할 리가 없다. 자무카는 자존심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을 개마초였으니까.

테무진은 왜 자무카를 그토록 살리고 싶었을까. 첫째, 누누이 설명하지만 이미 경쟁은 끝났다. 우정만 남은 상태에서 사랑하는 친구를 죽이고 싶을 리가 없다. 기본적으로 두 사람은 베스트프렌드였던 것이다. 테무진은 자무카를 정말로 사랑했다. 그가 가장 배고프고 힘들 때 먼저 찾아와 친구가 되어준 사람이었으니까.

둘째, 테무진만큼 자무카의 능력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테무진은 새로운 통일국가에 자무카의 군사적 재능이 함께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실제로 테무진의 대사를 잘 보면, 그는 자무카에게 신생 제국의 2인자 자리를 제안하고 있다.

셋째, 테무진의 양심. 테무진이 초원통일을 달성하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든 어떤 노력을 했든, 그에게 최초로 무리를 이끌며 리더가 될 기회를 준 이는 자무카였다. 목동 테무진은 자무카의 무리에 합류하면서 최초로 전사가 되었다. 자무카로부터 군사와 유목, 즉 ‘경영’을 배웠다. 테무진이 독자적인 세력을 갖게 된 건 자무카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를 선택하면서부터다. 다시 말해 테무진은 자무카가 만들어 준 세력을 얻어먹고 지금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때 자무카가 테무진을 자기 조직의 2인자로 받아 들여준 건, 아무리 자무카 본인의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고 해도 안다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제 상황이 역전되었다고 자무카를 죽이거나 내친다는 건 테무진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을 일이다.

그러나…

자무카는 테무진의 호의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는 죽음을 원했다.






자무카는 자신이 죽어야 될 이유를 섬뜩하리만치 냉정하게 설명한다.

“천하가 너의 것이다! 내가 살아있으면 네 꿈자리가 불편해질걸? 날 죽이면 간단히 마음이 편해질 터인데 말이야.”

그러면서 테무진에게 겁을 준다.

“나는 그대의 마음을 괴롭힐 것이다. 그대 옷깃의 이, 그대 안깃의 가시가 될 것이다.”

이 대사는 자신의 야심을 표현한 것이다. 자무카는 야심가다. 테무진이 살려주면 쿠데타를 모의하든 암살을 계획하든, 자신이 초원의 주인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릴 인간이다. 자무카는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테무진의 호의에 기대 훗날을 도모할 생각을 않고 저런 솔직한 말을 했을까? 그야 물론 자존심 때문이다.

테무진의 우정에 기대 목숨을 구명 받고 중책에 기용된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테무진을 해하려 한다… 자무카는 그런 비겁한 유혹에 흔들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그런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는 유혹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게 길이다.

자무카의 훌륭한 점은, 자존심 빼곤 시체인 개마초일 망정 자신과 테무진에 대한 평가가 정확했다는 것이다.

“형제는 현명한 어머니를 갖고, … 재능 있는 아우들이 있고, 호걸 동무들이 73마리 거세마가 되어 주었다.”

테무진은 어머니와 형제, 그리고 동료들의 지지를 받고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이었다는 얘기다. <몽골비사>에서 ‘73마리 거세마(군용 전투마)’라는 표현만 나오는데, 73이라는 숫자는 아무런 상징성도 없는 만큼 아마 자무카는 그들의 이름을 다 말했을 것이다. 네 마리 말과 네 마리 개는 물론이고, 테무진에게 중요한 73명의 이름을 줄줄 꿰었을 것이다. 재능과 카리스마로 테무진을 압도했던 자무카는 테무진이 어떤 점에서 자기보다 훌륭한지 알고 있었다. 테무진은 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걸 말이다.

사실 자무카라는 인간을 살펴보면, 죽으려고 한 게 충분히 이해가 간다. 테무진은 초원을 통일했다. 이 정도 개마초라면 통일된 초원의 2인자로 살기보다, 초원을 통일한 영웅과 대등한 적으로 죽는 게 더 명예로울 수 있다. 실제로 역사는 자무카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을 기록한다.

“이 생애에, 태양이 떠오르는 지점에서 태양이 지는 지점까지, 형제와 내가 피를 튀기며 서로 차지하려고 싸운 이 온 천하가 나의 이름을 알고 있다.”

테무진은 초원을 통일해 영원이 역사에 기록될 남자다. 그와 대등한 적으로, 동급의 사내로 기억되겠다는 말이다. 자무카는 ‘용서 받은 2인자' 대신 ‘용서를 거부한 대등한 경쟁자'를 택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 술 더 뜬다.

“형제여, 어서 나를 죽여라. 나의 영혼은 그대와 그대 가족의 수호령이 될 것이다. 형제를 지켜 줄 것이다.”

이거 이거…

제사를 받아먹겠다는 얘기다. 전통 무속 신앙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건 후손으로서의 도리이기도 하지만, 주는 만큼 받겠다는 현실적인 계산이기도 하다. 조상의 영혼은 수호령이다. 자신들을 지켜주는 수호령을 삐지지 않게 하기 위해 정성을 보이는 거다. 초원 최고의 ‘흰 뼈’가 된 가문의 제사를 받아 동급 내지는 그 이상의 대우를 받겠다는 거. 참 야심 차지 않는가.

죽음을 요구하면서, 살아있으면 야심을 접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는 사람을 어찌할 수 있겠는가. 밀고 당기기는 한참 계속된 모양이지만, 테무진은 자무카의 뜻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무카는 초원 전통에서 가장 명예로운 죽음, 즉 피를 전혀 흘리지 않는 죽음을 요구했다. 피에 대한 초원 사람들의 관념은 지난 이야기들에 충분히 설명한 바 있다.

이렇게 자무카의 처형이 결정된다. 확실히 자무카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기억되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테무진의 적은 한두 명이 아니었고 아직 광대한 정복의 역사는 시작도 되지 않았지만, 오직 자무카만이 그의 필생의 라이벌로 기억되니 말이다.





자무카의 처형식은 장중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죽었을까. 세 가지 설이 있다. 가장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예상되는 첫 번째는 말을 이용한 것. 풀밭에 자무카를 눞게 하고 가죽 깔개를 두텁게 씌운다. 그 위로 말 떼가 우르르 지나간다. 장출혈, 복합골절, 질식에 의해 사망에 이른다. 간단히 말해 압사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카사르가 자무카의 허리를 꺾어 죽였다는 가설도 있다. 초원 유일의 대칸이 죽음을 만류한 친구이니만큼, 아무나 집행인으로 나설 수 없다. ‘집도’하는 사람이 테무진의 혈육인 카사르인 것은 자무카의 명예를 존중하기 위해서다. 카사르는 자타공인의 장사인 데다 사람 여럿 때려 죽여본 인물. 고통을 최소화하며 숨을 끊으려면 이런 경험자가 나서는 게 상식이다.

마지막으로, 나무로 된 기구를 만들어 썼을 수도 있다. 자무카를 위해 특별 제작된 ‘복합골절기구’인데, 형태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레버’를 당기거나 끈을 잡아당기면 자무카의 몸이 뒤틀려 온 몸의 뼈가 부러지는 구조였을 것이다.

첫 번째의 경우는 즉사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이때는 뼈가 부러져 식물인간 상태가 된 피형자가 홀로 ‘존엄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풀밭에 방치하는 게 룰이다. 이 경우 자무카는 빠르면 몇 시간, 길게는 며칠 동안 혼자 고통을 참으며 서서히 죽어갔을 것이다.

참고로 초원에서 목을 매다는 교수형 문화는 없었다. 하긴 교수형을 당하면 정액과 배설물을 쏟게 된다. 자무카가 그런 꼴을 원했을 리도 없고, 정액을 흘리는 게 피를 흘리는 것보다 못하면 못했지 더 좋을 리도 없다.

나 같으면 그냥 칼로 빠르게 끝내 달라고 할 것 같은데, 하여간 이것도 곤조는 곤조다. 자기가 명예롭게 죽겠다니 뭘 어쩌겠는가. 테무진은 자무카의 시신을 정성껏 안장했다고 한다. 특히 몽골 구전에 따르면, 젊은 시절 자신이 선물해준 황금 허리띠를 채워 묻어주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보르테를 납치해 간 메르키트족을 쳐부수고 세 번째 안다 의식을 치를 때 허리띠와 말을 교환했었다(테무진은 검은 말을, 자무카는 백마를 서로에게 선물했다.) 그렇다면 자무카는 죽을 때도 그 허리띠를 차고 있었다는 뜻인데, 다시 말해 평생 차고 다녔다는 얘기다.

자무카를 처형하고 나자 테무진은 공포에 사로잡힌다. 화끈한 자무카의 영혼이야 뒤끝이 있을 리 없겠지만 지상의 모든 일을 내려다보는 ‘영원한 푸른 하늘’ 텡그리가 문제였다. 이렇게 사이즈가 큰 남자를 함부로 죽여도 되는 걸까 싶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무카에게 압도적인 면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테무진은 자신이 모시는 텡그리는 위대하지만 단순해서, 복잡한 속사정을 몰라줄까 겁이 났다.

그래서 속임수를 쓰기로 한다. 원래 무속에는 신령을 속이는 속임수가 꽤 많다. 대표적인 것이 시신의 얼굴에 가면을 씌우는 것이다. 그러면 망자가 생전에 죽인 적들의 영혼이 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해 해코지를 하지 않는다는 관념이다. 사냥한 동물을 죽일 때 눈을 감기는 것도 자신을 죽인 자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다.


카라키타이(서요제국)에서 출토된 묘의 부장품.
거란족들도 무속적 관념에 따라 전사의 시신에 가면을 씌웠음을 알 수 있다.

테무진은 텡그리를 속이기 위해 형식적으로나마 자무카의 죄명을 만들어냈다.

“텡그리께서 ‘이만한 남자를 죽였다’며 분노하면 안 된다. 그 옛날에, 우리 13익 전투 할 때 말야. 그거 자무카의 친동생이 우리 양떼를 훔치다가 시작된 전쟁이잖아? 자무카가 먼저 시작한 거야. 그래 놓고 자무카가 이겨서 우린 엄청 고생했어! 이걸로 가자. 13익 전투를 핑계로 걸어 놓으면 텡그리께서 아 그런갑다~ 하고 넘어갈 거야.”

자무카가 사라진 초원. 테무진은 초원 유목민 세계에서 유아독존, 원 앤 온리의 존재가 되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국가’를 창조할 차례였다.



(다음편 ‘예케 몽골 울루스’에서 계속)


부편집장 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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