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무진to the칸(15) 패자의 역습
2011.05.16.월요일
필독
1
(전편에 이어)오랫동안 타이치우드족의 칸이었던 뚱뚱이 칸 타르구타이는 별로 인기가 없었던 것 같다. 백성들에게 복수의 감정이 들게 만드는 건 일차적으로 인품의 문제지만, 능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타르구타이는 평민과 하층민들에게 뭔가 크게 잘못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를 찾아 보복하려는 백성이 있었던 걸 보면 말이다.
테무진의 눈을 피해 숲 속에 은신해 있던 타르구타이 가족. 그러나 이곳엔 다른 타이치우드 사람들도 있었으니… 바로 타르구타이를 사냥하기 위해 숲 속에 따라 들어온 한 가족. ‘시르구에투’ 노인과 그의 아들 ‘알락’, ‘나아야’였다.
테무진은 타이치우드 백성들을 사면하고 무리에 받아들였다. 시르구에투 가족이 이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그런데도 위험과 고생을 무릅쓰고 타르구타이를 추적했다는 건, 웬만큼 원한이 쌓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타르구타이의 품성이 좋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여간 타르구타이… 마침 혼자 숲속을 돌아댕기다가 시르구에투 3부자(父子)에게 딱 걸리고 만다.
“오오! 너희들도 날 버리지 않고 따라온 것인가?”
“X까네… 이눔자식아, 그래 보호자 어쩌구 하더니 백성들을 내비두고 도망가 버리냐?”
“이것들이 미쳤나… 어따 대고 반말이야?”
“이놈이 아직도 지가 잘 나가는 줄 아나. 우린 테무진 칸에게 귀순할거다! 빈손으로 가면 썰렁할 테니 네놈을 선물로 잡아갈 생각이다!”
말에 오를 수 없을 정도로 비만이었으니 거동도 불편할 터. 늙고 뚱뚱한 타르구타이는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홀랑 붙들려버렸다. 하지만 그를 호송하는 건 무척 불편한 일이었다.
“아 이새끼, 하도 뚱뚱해서 말이 버티질 못하잖아!”
“아버지, 어쩔 수 없이 수레를 써야겠는데요.”
“아오, 가뜩이나 먼 길인데 수레 하나를 이놈 태우는 데 써야하는 거야?”
“어쩔 수 없죠…”
시르구에투 가족은 타르구타이를 묶어(나무로 만든 칼을 씌웠을 수도 있다.) 수레에 태웠다. 그리고 테무진 무리의 야영지로 향하려는 그 때, 없어진 아버지를 찾던 타르구타이의 아들들이 다가왔다.
“아버지! 네 이놈을 아버지를 놓아주지 못할까!”
“앗…”
달랑 아들 둘만 다닌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전사들의 호위를 받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놈들을 베고 아버지를 구해라!”
“잠까아아안….”
위기에 빠진 시르구에투 가족. 시르구에투는 재빨리 헐리웃 영화에서 흔히 보는 장면을 연출한다. 시르구에투가 수레에 올라 타르구타이를 넘어뜨리고, 그 위에 올라타 목에 칼을 댄 것이다.
“가까이 오면 베어버린다!”
알락과 나아야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두 아들은 참으로 실용적이게도, 아버지를 놔두고 쌩 달아났다.
“저흰 도망가 있을 테니까 어떻게 함 버텨보세요! 혹 잘못되면 저희라도 남아서 대는 이어야죠.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그… 그래 알았다 이 자식놈들아…”
어쨌든 이렇게 당하게 되니 타르구타이가 아들들을 말리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야! 오지마! 애비 죽는다!”
하지만 타르구타이의 아들들은 아들들대로…
“이 새끼! 아버지를 죽이면 너희는 모두 몰살이다!”
‘아, 그러고 보니 나도 타르구타이를 죽일 수 없는 상황이네?’
도박에는 블러핑이란 말이 있다. 쎄게 나가는 거. 어쨌든 타르구타이의 목숨은 시르구에투의 손아귀에 있었다. 시르구에투는 머리를 굴려 과감한 블러핑을 시전했다.
“네놈들이 말장난을 하는구나. 이놈들아, 이놈을 죽이면 당연히 나도 네놈들한테 죽겠지. 하지만 아비를 살려줬다고 네놈들이 우릴 살려주겠느냐?”
초라한 가족이 기병전사들을 따돌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 타르구타이를 살리던 죽이던 어차피 우린 죽잖아? 그럼 저승 길동무라도 하나 만드는 게 덜 억울하지.”
시르구에투는 망설이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그가 타르구타이의 목을 따려는 찰나, 블러핑에 넘어간 타르구타이가 소리쳤다.
“얘들아!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 그냥 날 두고 가라! 너희들이 오면 내가 죽어버릴 참인데, 나 시체 돼서 구조되고 싶지 않거든? 그냥 가! 떨어져! 어차피 테무진은 날 안 죽인다!”
“아니 아버지, 대체 왜 테무진이 아버지를 해코지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믿는다는 말이 있다. 위기에 빠진 타르구타이의 뇌는 가장 좋은 시나리오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옛날에 말이다… 테무진이 꼬맹이였을 때, 예수게이가 야영지를 바꾸면서 테무진을 쏙 빼놓고 간 적이 있잖니? 해서 그녀석이 미아가 됐는데, 우리 타이치우드족이 이동하다가 발견해서 내가 어떻게 했냐. 먹이고 입히고, 응? 얼마나 잘 보살폈냐. 내가 아니었으면 테무진이 지 엄마아빠를 다시 만날 수나 있었겠냐? 테무진이 이렇게 큰 것도 다 내덕이라고!”
“저기 그건 정말 옛날이구요… 그 다음에 예수게이가 죽고 나서 테무진 가족을 버렸잖아요! 그것도 모자라 테무진을 붙잡아다가 목에 칼 씌워놓고 괴롭힌 건 생각 안나요?”
“그야 지 형을 죽였으니까 집안의 큰어른으로서 훈육 좀 한 거지!”
“아니 글쎄, 그걸 테무진이 훈육이라고 생각 하겠냐고요…”
“이것들아! 애비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잡아보겠다는데 그렇게 초를 쳐야겠냐! 테무진이 반드시, 꼭, 백프로 날 죽인다고 장담할 수 있어?
얘들아, 가까이 오면 이 노인네가 날 죽인다잖아. 내 시체를 가져다가 뭐에 쓰겠냐? 사람 운이란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 내 목숨은 운명에 맡기고 너희는 어서 갈 길을 가라.”
결국 타이치우드 왕자들은 분을 삼키며 아버지를 놔두고 떠났다. 타르쿠타이의 아들들과 부하들이 사라지자 멀찌감치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알락과 나아야가 다시 나타났다.
“어이쿠 아버지~ 잘하셨어요!”
내가 시르구에투였으면 아들놈들 뺨따구라도 한 대씩 날렸을 거 같다. 하지만 시르구에투는 그러지 않았다.몽골인들은 삶과 죽음에 대해서 극도로 실용적이었다. 죽을 사람은 죽어도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 불필요하게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는 건 바보짓이다. 실리를 위해서면 몰라도, 영광과 명예 따위를 위해서 목숨을 감수하는 건 무식한 정도를 넘어서 그냥 4차원의 이야기다. 이게 몽골인들의 사고방식이었다. 이런 태도는 몽골제국이 세계를 정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
우쨌든… 시르구에투 3부자는 타르구타이를 끌고 테무진이 있는 곳을 향해갔다. 타르구타이까지 합해서,네 명 모두 나름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시르구에투 가족은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타르구타이는 혹시나 테무진이 자신을 살려줄지로 모른다는 희망을… 그런데 나아야는 희망에만 들떠 있기엔 좀 영리한 사람이었다.
시르구에투 가족이 ‘코토콜’ 습원에 다다랐을 때였다. 초원에서 습원이란, 강물에 젖은 축축한 초지를 말한다. 테무진을 만나려면 오논강 줄기를 따라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대충 표현하면 중간쯤 왔다고 생각하면 된다. 여행길 내내 머리가 복잡하던 나아야가 문제제기를 했다.
“저 아버지, 테무진은 배신자를 싫어하기로 유명한 인물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
이제 테무진은 초원의 중심인물 중 하나였다. 웬만한 사람들은 그의 성격이나 습관 등을 경험하거나, 들어서 알고 있었다.
“테무진이 타르구타이를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봐요. 어쨌든 우리 칸이었잖아요.테무진은 타르구타이를 죽일 테지만, 과연 우리는 가만둘까요? 우린 ‘제 칸을 배신한’ 인간들인 거라구요.”
“듣고 보니 그 말도 맞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지? 우린 타르구타이를 이미 붙잡고 있는데.”
“타르구타이를 놔줍시다.”
“엥?”
“놔 주고, 테무진에게 귀순해서 솔직히 말하는 겁니다. 칸께서는 자신의 칸을 배신한 인간을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타르구타이를 놔주고 보시다시피 우리만 오게 되었다, 이렇게 걍 다 솔직히 말하는 겁니다.”
“으… 하지만 그러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인간을 살려 보내고 온 놈들이 되는 거잖아?”
“테무진은 신의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라잖아요. 타르구타이가 아무리 미워도, 우리를 미워하지는 않을 지도 몰라요.”
시르구에투 가족은 궁리 끝에 판돈을 모두 올인하는 베팅을 했다. 타르구타이, 즉 판돈 전체를 걍 살려 보내준 것이다. 이때 타르구타이의 기분은 그야말로 날아갈 것 같았으리라. 뭐, 실제로는 날기는커녕 말도 못 타서 자식과 부하들이 있는 곳까지 터벅터벅 걸어가야 했을 테지만.
그렇게 테무진을 방문한 귀순용사들이 면접을 보는 자리.
“그대들은 어떻게 나에게 왔는가?”
시르구에투는 있었던 일들을 솔직히 얘기했다. 도박은 성공했다.
“내가 아무리 그 인간을 죽이고 싶어도, 너희한테는 칸이다. 타르구타이를 풀어주지 않았다면 너희는 모두 죽은 목숨이었다.”
테무진은 나아야를 크게 칭찬하고 상까지 주었다. 정확히 어떤 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상당히 좋은 직책을 준 것 같다. 테무진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하급장교나 신임하는 부하의 부관, 케식(호위군사)의 멤버 등 눈에 띄는 자리에 꽂아 넣은 후 면밀히 관찰해 능력치를 판단하곤 했다. 이후 나아야는 테무진의 중요한 장수로 성장하게 된다.
뉴페이스뿐 아니라 익숙한 손님도 찾아왔다. 테무진의 막내숙부 다리타이였다. 그는 형 예수게이가 죽고 난 후 테무진 가족을 버렸다가, 테무진이 성공하니까 다시 찾아왔다가, 테무진이 13익 전투에서 패배하자 (아마도 자무카에게 귀순하려고) 잽싸게 떠났던 초원 최고의 철새.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다리타이는 은금슬쩍 다시 테무진 무리에 합류해 있었다. 테무진이 쿠이텐 전투에서 대승한 이후가 분명하다.
테무진은 다리타이를 참 많이도 봐줬다. 다리타이는 아버지 예수게이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주는 유일한 생존자였다. 테무진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었다. 이런 경험은 가슴 한구석을 텅 비게 만든다. 테무진은 다리타이를 통해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우려했던 것 같다. 그래서 되도록 막내숙부를 잘 모시려고 애쓴 모양이다. 그런 테무진의 마음과는 달리, 철새종결자 다리타이의 여정이 끝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3
여기까지가 테무진이 쿠이텐 전투에서 승리하고 나서 ‘전후정리’를 한 이야기다. 타이치우드를 박살내고,자신을 죽일 뻔한 명사수 지르고아다이를 ‘제베’라 이름 붙여 부하로 삼고 등등. 그런데 애초에, 쿠이텐 전투에서 승리한 후 테무진은 타이치우드를, 옹 칸은 자무카를 추격했다. 옹 칸과 자무카는 어떻게 되었을까?
옹 칸은 자무카를 확실히 밟아서 싹을 자르기 위해 추격한 게 아니었다. 역사가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아마도 자무카를 부하로 포섭하기 위해 쫓아간 게 분명해 보인다. 왜였을까? 자무카는 옹 칸과 테무진에게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나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헌데 다 이겨놓고 친구가 되자고 손을 내민다? 역시 이상해 보인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옹 칸은 첨부터 테무진과의 신의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뼛속까지 정치꾼인 그는 소(小)이이제이를 위해 테무진과 함께했을 뿐이다. 젊은 시절, 자신을 살려주고 칸의 자리에까지 앉혀준 예수게이의 은혜는 테무진을 후원하는 명분에 불과했다. 자무카가 혼자만 너무 잘 나가서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면 안 되었다. 따지고 보면 옹 칸은 자무카와도 의형제를 맺은 사이다.
옹 칸을 위해서는 두 몽골 젊은이가 서로 비등한 세력을 유지하며 치받고 싸워야 한다. 그런데 쿠이텐 전투의 승리로 테무진의 위상이 급등했다. 그러니 이번엔 기세가 한풀 꺾인 자무카를 지원할 차례였다. 물론 옹 칸의 정치놀음에서나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그와 연합을 이룬 테무진 입장에서는 심각한 배신행위였다. 함께 맞아 싸운 공동의 적과, 누구 맘대로 혼자 손을 잡는단 말인가?
두 번째 이유는 자무카의 능력이었다. 옹 칸은 정치에선 영악했지만 군사적 재능은 평범했다. 그 자신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무카가 쿠이텐 전투에서 진 이유는 단지 운이 없어서였다. 한번 졌다고 재능과 카리스마가 어디 가지 않는다. 옛날, 테무진을 도와 보르테를 되찾으러 메르키트를 쳤을 때 옹 칸은 당연한 듯이 최고사령관 자리를 자무카에게 넘기고 그의 명령을 따랐다.
커레이트의 세력과 자무카의 전투능력이 만난다면, 옹 칸은 초원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게 될 터였다. 게다가 커레이트족은 차돌처럼 단단하게 뭉친 테무진의 무리와 달리, 결속력이 매우 느슨했다.커레이트족은 애초에 부족연맹체다. 가장 영향력 있는 영주가 여러 영주를 대표해 왕이 되는 중세유럽의 봉건주의처럼, 옹 칸도 부족의 대표자일 뿐 모든 부족민들의 ‘직속상관’이 아니었다.
옹 칸은 칸이 되기 전에 권력투쟁에서 동생에게 밀려 예수게이에게 도망쳐온 적도 있고, 칸이 되면서 엄청난 숫자의 경쟁자들을 처형했다. 커레이트 내부에서는 옹 칸에 대한 지지만큼이나, 적개심도 들끓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의 자리는 그다지 안정적이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다른 인물도 아니고 무려 자무카의 지지를 얻는다면 누구도 그에게 함부로 대항하지 못할 터였다.
그러나…
자무카는 부하가 되기를 거부한 것 같다. 자존심이 워낙 세고 능력도 그에 못지않은 자무카는 누군가의 밑자리에 있는 걸 견딜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럴 이유도 없었다. 아직도 충분한 수의 부족/씨족들이 자무카를 지지하고 있었다. 뭐하러 노인네 밑으로 기어들어간단 말인가.
자무카는 전쟁의 패배자답게 자비를 구걸하지 않고 묵묵히 서쪽으로 갔다. 거기서 초원 변방의 부족들을 만나 오히려 지지세력을 더 확보했다. 그러나 자무카와 옹 칸 사이에 정치적 교감이 있었던 건 확실하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의 우호세력이 된다. 문제는 자무카와 테무진이 적이자 라이벌이었다는 거. 옹 칸의 양다리는 영리한 행동이었을지는 몰라도, 존경받을 만한 짓은 아니었다.
테무진은 옹 칸에게 적잖이 실망했을 것이다. 자무카에 대한 꿍꿍이는 테무진이 옹 칸에게 당한 첫 번째 배신이었다. 하지만 테무진은 마지막 순간까지 옹 칸을 믿었다. 아니 믿으려 했다. 이런 우직함은 테무진에게 많은 손해를 끼쳤지만, 결국은 테무진의 든든한 자산이 된다. 이 이야기는 천천히 하자.
4
여기서부터는 정확한 연대가 모호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정확히 어느 시점에 일어난 일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분명히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이다. 나는 쿠이텐 전투 이후의 일이라고 상정하고 쓰겠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옹 칸은 지위는 밖에서는 화려했지만 안에서는 흔들거렸다. 그는 칸이 될 때와 마찬가지로, 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많은 피를 봐야 했다. 옹 칸은 특히 친족들과 알력이 심했다. 자카 감보와는 오랫동안 동맹을 유지하는 상태였지만 또다른 동생 ‘에르게 카라’와는 그렇지 못했다.
아마 에르게 카라는 옹 칸의 자리를 노린 것 같다. 그는 친형 옹 칸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후 서쪽으로 간신히 도망가 나이만에 망명했었다. 그 뒤로 쭉 나이만 궁정의 후원을 받고 있던 상태. 그런 그에게 드디어 형에게 복수할 기회가 찾아왔다. 나이만 군대가 에르게 카라의 복권을 명분으로 커레이트를 침공한 것이다.
쿠이텐 전투는 초원 전체를 자무카 파와 테무진-옹칸 파로 갈라놓았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전투에서 나이만의 제1권력자 타양 칸의 동생 부이룩 칸이 자무카 편에 섰다가 패배했다. 나이만은 초원 동쪽에 발을 담갔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테무진, 옹 칸과 원한이 생겼다. 냉장고에 저장해둔 정치적 식품-에르게 카라-을 꺼낼 때였다.
옹 칸은 자신만만했다.
“에르게 카라, 이새끼가 다시 형한테 개긴다고? 나이를 먹으니까 옛날에 두들겨맞은 생각이 안 나나 보지?”
옹 칸은 군대를 이끌고 나이만군을 맞으러 출정했다. 하지만 나이만의 실력은 만만치 않았다. 버젓한 ‘국가’라 불러도 별 손색이 없는 나이만의 군대는 옹 칸과 자카 감보의 군대를 여지없이 박살냈다. 옹 칸은 에르게 카라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커레이트족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나이만이 관리하는 괴뢰국으로 전락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당시 역사를 보면, 초원에서 위기에 빠진 사내들은 서쪽으로 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주를 포함한 동아시아 북동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금나라, 그리고 송나라의 국경을 생각해보면 동쪽은 딱히 갈 데가 없다. 유목민 국가(및 집단)들이 점점이 퍼져 있는 서쪽을 향해 튀는 게 최선이다. 현지의 군주에게 잘 보이면 정식으로 망명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초원 서쪽에 있는 게 바로 나이만이다. 비참하게 패배한 옹 칸은 소수의 인원만 이끌고 카라 키타이,즉 서요제국으로 도망갔다. 서요제국의 황제 ‘구르 칸’은 옹 칸의 망명을 허락했다. 또 다른 ‘구르 칸’인 자무카와 헷갈리지 말자. 구르 칸은 황제급의 칸에게 쓰는 흔한 명칭 중 하나였다.
녹색으로 표시된 카라 키타이의 영토. 저 동네까지 간 거다.
옹 칸은 구르 칸과 별로 잘 지내지 못했다. 습관은 관성이다. 권력자들은 처지가 바뀐 뒤에도 자신의 처지를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망명자가 현지의 최고권력자와 사이가 틀어지는 건, 품성이 아니라 절제력과 신중함의 문제다. 굴러온 돌멩이가 박힌 바위의 눈 밖에 나면 결론은 뻔하다.
옹 칸은 야반도주하듯 위구르 왕국의 땅으로 넘어갔다. 망명자가 아니라 방랑자 신세였다. 생존필수품 확보와 치안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비교적 안전한 도시에 머물렀다(이 도시의 이름은 ‘베쉬발릭’이다.). 그 다음에는 탕구트의 도시로 갔다(유목국가들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편들에 충분히 설명을 해 놓았다.).
명색이 칸인데, 아무리 급하게 쫓겨 달아나도 수중에 재물이 없을 리 없다. 하지만 도시는 기본적으로 소비공간이다. 이방인인 옹 칸은 1년이 안 되어 ‘총알’을 모두 써버리고 말았다. 빈털터리가 된 옹 칸은 결국 도시 바깥으로 나왔다. 유목민의 땅에서 유목민이 할 게 유목밖에 달리 있겠는가. 하지만 뭐 가진 게 있어야 가축을 구하지…
그래도 옹 칸은 기지를 발휘해 야생 염소 5마리를 겨우 붙잡았다. 옹 칸의 패잔병 무리는 염소를 끌고 다니며 젖을 짜 간신히 허기를 채울 수 있었다. 사실 염소젖도 부족해서, 한두마리 있었던 낙타의 혈관을 찔러 피를 내 마셨다.
유목민들은 정말 먹을 게 없는 위급상황에서 가축의 피를 마시곤 했다. 살아있는 짐승한테 너무한다 싶을 수 있다. 사실 요령만 있으면 가축은 별로 고통을 느끼지도 않고, 피는 필요한 양만 재빨리 마시고 금방 지혈한다. 혈관의 정확한 위치를 잡으면 신기할 정도로 금방 피가 멎는다. 초식동물들 중에는 피를 어느 정도 잃어도 별 탈이 없는 종들이 있는데, 유목민들이 모를 리 없다. 요즘도 아프리카의 유목/목축 부족민들은 이런 식으로 가축의 피를 마시곤 한다.
소피를 받는 마사이족 전사들. 보다시피 소는 멀쩡하다. 기분은 별로 안 좋아 보이지만… 첨언을 하자면, 마사이족은 궁해서가 아니라 종교, 문화적인 이유로 소의 피를 마신다.
그렇다고는 해도, 옹 칸 본인이 낙타의 피까지 마실 정도면 이게 대체, 인생 말년에 웬 고생이란 말인가. 어찌된 일인지 배가 고플 땐 항상 자세도 안 나오는 법이다. 옹 칸이 타고 있던 말은 한쪽 눈이 먼 병든 말이었다.
“아 씨바, 도저히 안 되겠다. 자존심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누구 도와줄 사람 있으면 살려달라고 해야겠다.”
“옹 칸 님, 자무카한테 손을 벌려보는 건 어떨까요. 저번에 칸께서 전쟁에서 이기고도 손을 내민 친구 아닙니까.”
“그거야 나도 나름의 목적이 있으니까 그런거지. 자무카가 바보냐, 그걸 모르게? 그리고 자무카가 어디 실패자를 인간으로 봐줄 남자냐? 그 얼음장 같은 인간이 잘도 날 보살펴주겠다.”
“그럼 남은 사람은 테무진 칸 밖에는…”
“아오 씨바…”
이건 너무 비참했다. 테무진의 뒤통수를 치고 자무카를 포섭하려고 했던 옹 칸이다. 또한 나이만과 싸울 때 연합을 무시하고 혼자 군사를 모아 출정했다. 이건 전쟁에서 이겼을 때 승리의 단물을 독점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는데 어쩌겠는가? 테무진은 옹 칸이 보낸 사자를 통해 그의 간절한 메시지를 들었다.
“살려줍메!”
5
한편 자카 감보는 형과 떨어져서 혼자 헤매고 있었다. 두 형제가 이산가족이 된 걸 보면 전투에서 얼마나 큰 타격을 입었는지 알 수 있다. 자카 감보는 금나라 변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금나라는 자카 감보를 쫓아내지는 않았지만, 망명 신분을 공식적으로 승인해주지도 않았다. 금나라 입장에서 옹 칸과 자카 감보 형제는, 옹 칸이 초원 중앙의 권력을 손에 쥐고 있을 때나 가치 있는 카드였다. 그래도 자카 감보는 망명승인을 받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별 희망은 없었지만…
옹 칸과 자카 감보의 소재를 파악한 테무진은 옹 칸 형제를 도와주기로 결정했다. 테무진은 옹 칸에게 화가 나지 않았을까? 옹 칸의 부탁을 씹어도 그만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옹 칸을 도와야 할 이유가 있었다. 개인적인 신뢰의 문제가 아니라 동맹세력을 어떻게 유지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커레이트는 금방이라도 쪼개질 수 있는 불안정한 집단이었다. 이걸 외부인인 테무진이 직접 해결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옹 칸이 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 커레이트족 병력 전부가 테무진의 편이었다. 타타르가 테무진에게 이를 갈고 있었고, 자무카는 건재했고, 불구대천의 원수 메르키트족도 반격을 노리고 있었다.나이만과도 적이 되었다. 이때부터 테무진은 위상이 높아진 것 만큼이나 ‘패자의 역습’에 시달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옹 칸이 권력을 회복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건 너무나 합리적이다. 이왕 도와줄 거, 화끈한 게 좋다. 테무진의 부하 두 명이 옹 칸을 멀리까지 마중 나갔다. 귀한 손님에게 하는 예법이다. 거지취급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테무진은 옹 칸의 몰골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정치적인 계산이고 뭐고, 아버지의 의형제였다. 르네 그루쎄는 옹 칸을 ‘2류 군주’였다고 평가한다. 역사엔 1류들이 하도 차고 넘쳐서 잘 와 닿지 않지만, 2류 군주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어쨌든 폭력이 지배하는 거친 초원에서 살아남은 백전노장이다. 저 정도로 비참한 꼴을 당해 마땅한 인간은 아니었다.
테무진은 아예 옹 칸과 그의 부하들만을 위한 특별세를 걷었다. 농경문명에서 곡식을 세금으로 내듯, 유목문명의 세금은 가축이었다. 몽골초원에서는 그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식량인 양을 중요시했다.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생식능력이 없어 식량으로만 쓸 수 있되, 고기가 가장 먹기 좋을 때인 두 살짜리 거세한 숫양>이 가장 이상적인 세금이었다. 다시 말해 특별세는 곧 옹 칸의 식량이었다. 테무진은 옹 칸을 극진히 보살폈다. 먹이고, 재우고, 치료해주고… 양고기의 질 좋은 단백질과 풍부한 지방은 보름만에 옹 칸을 통통하게 만들었다.
한편 자카 감보도 늪에서 건져내야 했다. 하필이면 메르키트족이 자카 감보를 노리고 있었다. 떵떵거리며 잘 살던 메르키트족을 박살낸 자들이 누구던가. 테무진, 자무카, 옹 칸, 자카 감보가 아니던가. 자무카와는 손을 잡았고, 테무진한텐 아직 도전할 처지가 못 되고, 금나라 국경에서 외롭게 헤매고 있는 자카 감보를 찾아 죽인다면 조금이나마 복수를 완수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국경 근처에서 매복하고 있던 메르키트족 전사들은 자카 감보대신 테무진의 군대를 만나고 말았다.매복수색대가 정규군을 당해낼 리 없다. 전투가 시작되고 나서 패배가 확실해지자 메르키트 전사들은 초원의 변방으로 도망쳤다. 테무진의 군대는 자카 감보를 모시고 돌아왔다.
옹 칸에게 커레이트의 칸 자리를 돌려주는 ‘왕좌수복작전’은 간단하게 끝났다. 옹 칸은 커레이트 전체와 싸울 필요는 없었다. 지지파와 반대파가 어지럽게 얽혀 있는 조직 특성상, 대부분의 백성은 윗대가리들의 권력투쟁을 방관하게 마련이다. 영국의 장미전쟁이 소수 귀족간의 투쟁이었던 것과 비슷하다.
권력을 되찾은 옹 칸은 피의 숙청을 시작했다.
6
옹 칸은 먼저 친동생인 에르게 카라를 처형했다. 젊은 시절 칸에 등극했을 때도 수십 명을 저승으로 보낸 그는 이번에도 에르게 카라를 지지했던 부족 내 인사들의 목숨을 저인망으로 쓸어버렸다. 권력자가 자기 권력을 재확인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면, 일시적으로는 공포를 자아낸다. 하지만 지도자의 본질적인 권위는 도덕성에서 나온다.
옹 칸의 위상은 크게 떨어졌다. 그는 권력을 되찾자마자 쿠데타의 위기를 맞게 된다. <몽골비사>에 나오는 커레이트 귀족들의 대화는 옹 칸에 대한 분노와 경멸이 어느 수준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의 칸은 성품이 형편없다. … 형제(에르게 카라)를 죽였다. 카라 키타이에서 망명생활이나 한 주제에 돌아와서 백성을 괴롭히는 꼴을 보라. 우리가 과연 가만있어야 하는가? … 나이만이 무서워서 위구르, 탕구트 땅을 숨어 돌아다니다가 겨우 염소 다섯 마리에 의지해, 낙타의 피를 먹으며 돌아왔다. 그걸 테무진이 주워다 먹이고 보살폈었지! 그랬던 주제에 이제 다시 자기가 우리의 칸이라고 저러고 다닌다.”
아마 비밀 쿠릴타이에서 나온 발언일 것이다. 귀족들은 그 자리에서 쿠데타를 결의했다. 줄곧 옹 칸을 지지해온 동생인 자카 감보까지도 반란에 가담했다. 아마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경험이 가장 많은 자카 감보가 칸에 등극하기로 했었을 것이다.
옹 칸은 운이 좋았다. 분노를 토로하던 그 자리에서 ‘욱하고’ 반란을 모의하다보니 무척이나 허술했다. 왜 사람이란 게, 누굴 욕하는 자리에 있으면 분위기에 휩쓸려서 다른 사람들을 거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 나중에 혼자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실 나한테 무척 잘해준 양반인데… 하는 식이다. ‘알톤 아쇽’이라는 귀족이 그랬다. 반란에 엉겁결에 가담했지만, 옹 칸을 배신하는 게 아무래도 영 내키지 않았다.
알톤 아쇽은 고민 끝에 옹 칸에게 반란 계획을 알렸다. 당연히 옹 칸은 즉시 케식(호위대)을 보내 반란 가담자들을 체포했다. 자카 감보도 형처럼 운이 좋았다. 그는 용케 몸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말을 달렸다. 근데 어디로 도망가지…?
자카 감보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이만으로 도망쳤다. 옹 칸과 함께했을 때는 나이만이 적이었지만, 칸 형과 결별한 후에는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거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 아니 형의 적은 나의 친구가 되는 상황이 됐으니 자카 감보의 인생도 막장을 타기 시작했다고 보면 된다.
옹 칸의 케식은 체포한 자들을 목에 칼을 씌워 게르에 가둬놓았다. 옹 칸은 게르에 들어가 죄수들에게 언성을 높였다. 그런데 옹 칸의 말은 적에 대한 공격심이라기보다는, 어쩐지 삐진 노인네의 역정에 가깝다.
“그래, 나 외국에서 거지꼴로 돌아다녔다. 그런데 내가 그 개고생을 할 때 너넨 뭐했냐? 뻔히 알면서, 응?코빼기도 안 비추고 내 흉이나 보고 있었다 그거지?”
전에 옹 칸 얼굴로 이 냥반 사진 쓴 적이 있다.
뉘신지도 모르는데 여튼 초상권 침해 죄송타…
옹 칸은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 반란자들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으로 끝냈다. 굉장히 모욕적인 일이지만, 목숨을 잃거나 다치는 아니고 신분이나 생활에 타격을 입은 것도 아니다. 옹 칸이 마음이 좋아서 봐 준 게 아니다. 더 이상 피를 봤다간 이젠 내가 골로 가겠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는 뜻이다. 옹 칸은 권위가 떨어진 수준을 넘어, 자기 자신도 스스로의 권위를 인정하지 못하는 단계에까지 갔다.
반란자들은 살려달라고 빌지도 않았고 살려줬다고 감사하지도 않았다. 옹 칸이 칼을 풀어주자 모두 일어서서 바닥에 침을 퉤 뱄었다. 얼굴에 침을 맞은 데에 대한 감정적 복수였다. 다시 말해 “아 노인네 정말 좆같네” 한 거다.
자신의 권력이 사상누각이 되면 자신감은 줄고, 불안감은 늘어나는 법. 이때부터 옹 칸은 자신의 이익에 집착하면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테무진에게 점점 점수를 깎이게 된다.
7
한편 테무진은 승승장구 중이었다. 테무진의 울루스는 그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으로 꽉 묶여 있었다. 외적으로도 급성장했다. 13익 전투에서 자무카에게 패해 벼랑끝으로 내몰린 건 이제 먼 옛일이 되어버렸다.테무진은 타타르와 싸워 이겼고, 주르킨족을 정벌하고, 쿠이텐 전투에서 승리하고, 타이치우드족을 흡수했다. 고향인 초원 북쪽으로 돌아오려고 준비중인 메르키트족에도 한 방 먹였다.
테무진은 대기만성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성장하지만, 반드시 성장한다. 그는 지금까지 치른 큰 전쟁에서 모두 연합세력의 도움을 받았다. 보르테를 되찾을 때는 자무카와 옹 칸에 군대에 얹혀 출정했고, 금나라와 옹 칸의 연합군에 합류해 타타르를 쳤다. 쿠이텐 전투도 옹 칸과 연합군을 구성해 싸웠다.
테무진은 불혹의 나이에 드디어 독자적으로 전쟁을 계획했다. 첫 상대는 당연히 원수 중의 원수 타타르였다. 전쟁은 상대를 파멸시키기 위해 서로가 모든 힘을 다하는 위험한 투쟁이다. 따라서 모든 전쟁이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타타르와의 싸움은 특히 중요했다.
잔혹한 얘기지만, 이제껏 초원에서 전쟁은 사업이었다(이제 이 얘기를 다시 할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마오쩌둥은 “전쟁은 피를 흘리는 정치이고, 정치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이다.”라는 무척 간지나는 말을 했다. 테무진은 전쟁사업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약탈도 물론 중요했지만, 그는 정치적인 전쟁을 할 생각이었다. 한때 제국을 세우기도 했던 전통의 세력, 독립민족으로 존재하는 타타르라는 집단을 지상에서 증발시키려고 했다.
타타르와 몽골족은 원수 중의 원수였다. 몽골의 칸을 금나라에 팔아넘기고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게이까지 독살한 타타르. 테무진도 타타르의 칸인 메구진 세울투를 죽이고 타타르의 허리가 휘도록 약탈을 했으니 공평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원한은 비교거래로 해소되는 게 아니라 누적되는 법이다.
타타르는 금나라와 옹 칸, 테무진 연합군에 짓밟힌 후에 서서히 세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꺾는다면 완전히 싹을 자를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기를 놓친다면 테무진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한 무시무시한 군사집단이 될 것이었다. 또한 커레이트 부족 내 옹 칸의 입지가 좁아지고 자무카가 주춤한 이때, 타타르와의 전쟁에서 이긴다면 테무진은 초원 동쪽과 중앙을 아우르는 초원의 제1 실력자가 된다. 유치하고 전형적인 말이지만, “때가 왔다.”
물론 질 수도 있는 게 전쟁이다. 더욱이 타타르는 여러 개의 부족이 결집한 부족연합체, 혹은 원시적인 부족연합국가였다. 양적으로만 따지면 테무진보다 몇 배나 많은 전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테무진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일단 한 번 싸워본 상대였다. 정보와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한 테무진은 타타르 군대의 특성을 되뇌고 또 되뇌었을 것이다.
두 번째 자신감은 테무진 본인이 아니라 그의 부하들에 기인한다. 테무진의 굵직한 부하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남의 재능을 평가하고 활용하는 데 어떠한 편견도 없었던 테무진에 의해, 출신과 계급에 상관없이 오직 능력순으로 선발된 사람들이다. 테무진의 끈기도 한 몫을 했다.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테무진의 성격 덕분에 그의 부하들은 빨리 결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 없이 실력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테무진은 세계사에 전설로 기록될 8명의 인물을 선발했다. 이름하여 ‘네 마리의 개’. 그리고‘네 마리의 준마(駿馬 뛰어난 말)’. 이 네 마리 개를 영어에서는 주로 ’dogs of war’로 번역하는데, 싸움개 즉 투견 정도의 느낌이다.
사람을, 그것도 신임하는 부하들을 개로 부르다니 너무하다 싶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몽골에서 개는 육두문자에 자주 등장하는 신분이 아니다. ‘네 마리 개’는 오히려 애정이 가득한 말인데, 개는 다시 말해 인간을 따르는 늑대이기 때문이다.
몽골에서 늑대는 존경받는 토템이다. 헌데 늑대는 주인이 없다. 늑대에게 소속과 보스가 생기면 개가 되는데, 몽골의 개는 충성스럽고 용맹하며 끈질기다. 야생견은 먹이를 놓고 늑대와 투쟁할 만큼 사납고 머리도 좋다. 테무진의 네 마리 개는 네 명의 대장군으로서, 당연히 임무는 전쟁이다.
1. 젤메
숲 속 대장장이 노예계급 출신. 갓난아기 때 예수게이의 사유재산이 되었다가, 훗날 테무진이 상속받았다. 상황판단이 빠르고 임기응변에 능했다. 또한 테무진의 전략과 정책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인물로 전쟁터에서 테무진의 아바타 역할을 했다. 테무진 울루스의 2인자였다.
특별한 임무를 받지 않았을 때에는 테무진의 케식(호위대)을 지휘했다. 현대 한국으로 치면 수도방위사령관과 청와대 경호실장을 겸했다고 보면 된다.
2. 제베
테무진의 목을 쏘아 그를 거의 죽일뻔한 인물(저번 편 참고). 급하고 다소 다혈질인 성격답게 전격전, 속도전의 대가이며 빠르고 정확한 행군과 이동으로로는 지구상에서 따라올 장수가 없었다. 대단한 집중력의 소유자였다. 전투시 그가 보여준 집요함은 ’개’라는 별명에 딱 걸맞았다.
3. 수부테이
젤메의 친동생. 제베의 부관이었다가, 금새 제베와 같은 등급의 대장군으로 독립한다. 제베와는 찰떡궁합으로, 둘은 전설적인 전쟁콤비가 된다. 주로 제베는 수부테이가 세팅한 곳으로 적군을 몰아오는 역할을, 수부테이는 제베의 바통을 이어받아 적을 섬멸하는 역할을 맡았다.
4. 쿠빌라이
가장 덜 알려진 인물. 테무진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과 헷갈리면 안 된다. 동명이인일 뿐이다. 쿠빌라이는 테무진과 관련한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없다. 비범함이 없는 대신에 가장 안정적이고 무난한 장군이었다. 테무진이 설정한 디폴트 상태를 가장 잘 유지했다. 이런 종류의 인재는 건물의 뼈대처럼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다음은 참모라 할 수 있는 네 마리의 준마다. 말이 참모지, 사실상 참모를 겸한 장군이라고 보면 된다.
1. 보르추
어린 시절 말 8마리를 찾으러 도둑들을 추적하다가 테무진과 친구가 된 인물. 테무진 울루스의 3인자였다. 젤메와 마찬가지로 테무진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인물. 그 역시 테무진의 아바타였다고 보면 된다. 아마 사적으로는 테무진과 격의 없는 친구사이였을 것이다. 테무진은 보르추에게 위험한 임무를 맡길 때, 자신이 끔찍이 아끼는 애마(愛馬)를 내어줄 정도로 그와 우애가 깊었다(한편, 보르추는 이 말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며 채찍으로 졸라 팼다.).
2. 무칼리
노예씨족인 잘라이르씨족 출신. 니르운인 주르킨족의 노예로 살다가 테무진이 주르킨을 정벌하자 그의 부하가 되었다. 전투에 뛰어난 재능도 없는 데다가 굼띤 성격이었지만, 정밀하게 사고하는 능력이 있었다. 신중하고 끈기가 있어서 장기적인 전략을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데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3. 칠라운
테무진이 타이치우드족에 붙잡혀 있을 때 그를 도와준 소르칸 시라의 아들. 보르추와 마찬가지로, 사적으로는 테무진과 친구 사이였다. 형제 침바이도 테무진의 중요한 부하였다. 용맹한 칠라운은 한 번 문 목표물은 절대 놓지 않는 타입이었다.
4. 보로쿨
테무진이 주르킨족을 정벌할 때 적진에서 발견한 고아로, 테무진과는 의붓형제 사이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여 불과 10대의 나이에 테무진 오르도의 중심인물 중 하나가 된다. 테무진의 셋째아들 우구데이와 절친한 친구사이였다. 성장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이있지만 요절하고 만다. 물론 독자열분덜은 보로쿨이 죽는 장면까지 가려면 좀 기다려야 한다.
다음 편에 더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이 시점에서 이미 <네마리 개>와 <네마리 말>은 초원에 상당히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다시말해 훗날 세계를 정복하게 될 몽골제국의 시스템이, 테무진이 불혹의 나이이던 이때부터 조금씩 모양새를 잡아가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그리하여 1202년 가을. 테무진은 전면전을 치르기 위해 타타르가 있는 동쪽을 향해 출정한다.
(다음편 ‘킬링필드’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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